1972년 기지촌 마을에 개척된 고산제일교회
아버지 사역 계승해 지역주민 섬기는 목회자
대략 설명을 듣기는 했지만 생뚱맞기 이를 데 없는 마을이다. 서울에서 출발해 뻥 뚫린 구리-포천 고속도로를 내달리다 빠져나온 고산지구 국도는 8차선이나 됐다. 고산지구 맞은편 ‘빼뻘마을’에 들어가는 골목길은 8차선 대로에 겨우 잇대어 있었다. 누군가는 배밭을 미군들이 제대로 발음하지 못해 ‘빼뻘’이라고 했다고 설명했지만, 정확하진 않다.
조금 더 객관적으로 마을을 설명하자면, 지금은 평택으로 이전한 미군 부대 캠프스탠리에 바로 붙어 있는 수락산 끝자락 동네이다. 이제는 쇠락해 옛 정취만 남은 마을에 젊은 목회자가 사역하고 있다. 모두가 떠나고자 할 때 3년 전부터 목회하며 마을을 새롭게 변화시키고 있다. 고산제일교회 곽지황 목사가 주인공이다.
사람들은 떠나고 쇠락한 마을
‘빼뻘마을’은 한국전쟁 이후 자연스럽게 미군 부대 곁에 생겨난 기지촌이다. 한때는 미군을 상대로 돈 버는 사람들로 인해 ‘개도 달러를 물고 다닌다’고 할 정도로 부유했다. 돈을 벌기 위해 미군을 상대해야 했던 우리네 여인들의 가슴 시린 역사를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마을 입구에 농협이 지금까지 위치한 이유도 뒤늦게 이해가 됐다.
2000년대 들어 주한 미군이 줄어들고 부대마저 평택기지로 이전하면서 사람들은 떠나갔고 이제는 노인들만 주로 남았다. 골목길을 따라 이어지는 집들은 족히 40~50년 이상은 되어 보인다. 자세히 보니 집마다 쪽방들이 만들어져 있다. 아마도 과거 기지촌 여성들이 세 들어 살거나 일하던 곳이리라. 빼뻘마을에서 멀리 보이는 고산지구 신축 아파트단지가 이 마을을 더 생경하게 하는 것 같다.
마을과 붙어있는 고산제일교회 역시 아주 오래된 건물이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예배당 내부는 깔끔하고 잘 꾸며져 있는 것이 아닌가. 혼자 교회를 둘러보던 중 곽지황 목사와 연락이 닿았다. 직접 마중 나와준 곽 목사는 기자를 예배당이 아닌 마을 내 특별한 카페로 안내했다.
사실 고산제일교회는 1972년 곽지황 목사의 아버지 당시 ‘곽태관’ 강도사가 개척한 곳이다. 의정부 시내에서 부교역자로 시무하던 중 우연히 ‘빼뻘마을’을 알게 되었고, 누구도 들어가기 꺼리던 지역에 들어와 교회 문을 열었다. 기지촌 여성들에게도 복음을 전해주어야 한다는 부르심을 거부할 수 없었고, 영어를 할 수 있던 탓에 마을 주민들에게도 곽 강도사는 적잖은 도움이 되었다. 그렇게 젊은 사역자는 평생을 사역하다 이곳에서 은퇴했고, 누구도 목회를 잇겠다고 들어오지 않는 마을에 아들 곽지황 목사가 자원해 아버지의 사역을 계승했다.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 곳이기에
“소규모 병력만 남아 미군 캠프를 지키고 있고, 아직 부지 반환도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과거 아가씨들이 살던 방은 이제 독거 어르신들이 살고 계시죠. 세가 저렴해서 사회적 약자들이나 경제적 위기를 겪은 분들이 많이 들어오지만 대부분 금방 떠나고는 한답니다.”
젊은 목회자가 미래 비전을 세우기에는 마을은 너무도 낡았다. 하지만 곽 목사는 서울시내 큰 교회에서 사역하던 부교역자 자리를 사임했다. 시무 중이던 교회에서 만류했지만, 아버지가 은퇴하게 되면서 미룰 일이 아니라고 결심했다.
대부분의 사역이 멈추고 예배만 겨우 드리고 있는 상황에서도 교회의 동력은 이어야겠다는 마음을 단단히 품었다.
교회 시설은 곽지황 목사가 14년 전 청년 때 설비해두었던 그대로였다. 2022년 2월부터 3개월 동안 홀로 예배당 내부를 완전히 리모델링 했다. 산밑이라 즐비한 곰팡이를 제거하고 방수작업부터 페인트칠, 흡음 작업까지 진행했다. 글씨를 읽기 어려울 정도로 낡은 형광등도 LED로 교체했다. 그리고 교회 설립 50주년을 기념하며 정식으로 이취임예배를 드렸다.
“목회자가 없어 교회 문을 닫는다는 건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께서도 은근히 기다리고 계셨던 것 같고, 어머니는 아무도 오지 않는 곳이니 네가 들어와야 하지 않겠냐고 하셨습니다. 동네에서 나고 자란 제가 누구보다 교회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저도 기꺼이 자원할 수 있었습니다.”
마을 주민들의 마음 열기
선배 목회자들은 한번 들어가면 다시는 나오기 어렵다며 말렸지만, 그는 코로나 기간이라 카메라 한 대를 설치하고 유튜브에 설교 영상부터 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유튜브 설교를 듣고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이었다. 누군가는 금방 떠났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교회의 일원이 되어 지금까지 가족처럼 지내고 있다.
곽지황 목사는 목회를 하면서 빼뻘마을 주민들을 섬길 방법부터 찾았다. 동사무소를 방문해 마을 구성원들에 대한 개략적인 정보를 확인했을 때 그는 충격을 받았다. 일반 목회에 대한 비전도 갖고 있던 그는 사역 방향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한다.
“마을 주민 절반 이상이 사회적 약자였습니다. 도로 건너 고산지구에 신축아파트가 대거 세워진 만큼 전원교회도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었죠. 그런데 마을은 선교지 그 자체였습니다.”
젊은 목사가 오더니 교회가 깨끗해졌다고 어르신 교인들이 좋아하면서 마을에 자랑하곤 했다. 15명 내외이던 교인들도 30명 가까이 늘었고 재정도 30~40% 증가했다. 곽 목사는 시무 첫 해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12월 헌금 전액 350만원을 교회 밖으로 흘려보내자고 교인들에게 제안했다.
교회 차를 구입하려면 저축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아 마을 어르신들을 위해 쌀국수 70박스를 구매해 전해드렸다. 도움이 필요한 지역 단체에 기부하고, 신학교에서 같이 공부했던 외국인 목회자 가정 4곳에 400불씩 보내주기도 했다. 곽 목사가 또 나선 일은 지자체도 손 놓고 있던 마을 환경개선이었다. 방치되어 있던 마을 내 유일한 놀이터를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예전 시무했던 교회의 청년들이 직접 참여해 장비를 교체하고 녹을 닦아낸 후 페인트를 깨끗하게 칠해주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마을 분들의 마음이 열렸습니다. 작년에는 하나님께서 더 많은 은혜를 주셔서 송년예배 때 39명이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꾸준히 예배를 드리는 분까지 합하면 50명이 넘은 셈이죠. 연말 결산도 7,700만원이나 되어서 1,200만원을 선교헌금으로 지출했습니다.”
누구나 ‘정이 드는’ 마을 만들기
곽지황 목사는 도서관은 물론 상하수도 시설조차 없는 마을에 특별한 공간을 구상했다. 과거 교회가 있던 주택에서 살던 교인이 떠나자 그 공간을 주민들을 위해 단장하기로 한 것. 올해 봄까지 곽 목사는 또 홀로 머리를 동여매고 리모델링을 마무리하고, 그곳 이름을 ‘정이 든다’로 지었다.
곽 목사는 “‘이 동네는 도무지 정이 안간다’는 말을 어릴 때 참 많이 들었다. 어떤 이유에서 빼뻘마을에 들어왔든 주민들이 정을 붙이고 살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름을 ‘정이 든다’로 지었다”고 설명했다.
주일에는 교회학교 아이들을 위해 활용하지만, 주중에는 마을 주민 누구나가 이용할 수 있다. 카페이면서 도서관이고 공부방이다. 여기저기서 읽을 만한 책을 보내주었고, TV를 내걸어 명화를 볼 수 있는 갤러리처럼 꾸몄다. 모두 무료이고 운영 비용은 곽 목사 개인이 감당하고 있다.
잊지 못할 인연도 있었다. 마을 주민 누구나 저 노인은 교회에 절대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했던 할아버지가 ‘정이 든다’에 찾기 시작했다. 이름까지 알게 돼 ‘지황 목사!’라고 부르던 할아버지는 10번째 방문 때 ‘목사님!’하고 불러주었다.
“그런데 갑자기 할아버지가 오시지 않는 겁니다. 수소문했더니 의자에서 넘어져 병원에 입원하셨고 2주 만에 돌아가셨다는 겁니다. 아내 분과 통화하는데 병원에 있는 동안 다른 환자들이 ‘교회 다니냐’고 물었다는 거에요. 조문을 가서 예배를 드리고 3개월 동안 어르신과 교제했던 이야기를 해드렸습니다. 돌아가신 원인은 사실 말기암 때문이었습니다. 돌아가시기 전 할아버지는 지갑에 있는 돈을 모두 헌금하라고 하셨답니다. 교회에도 조용히 한번 오셨다 간 어르신이 하나님을 만나셨을 것이라 생각해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이방인들도 찾아와 하나님께 예배 드릴 수 있었던 열린 공간이 ‘이방인의 뜰’이다. 곽지황 목사는 빼뻘마을에서 3년차 사역을 펼쳐가며, 주민 누구나 교회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이방인의 뜰’ 회복하겠다는 비전을 품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과 삶으로 빼뻘마을 주민들과 섬기고 싶다는 한 젊은 목회자의 꿈이 무척이나 소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