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어두워질 무렵, 한 청년이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는 직장에서 속상했던 어떤 일을 떠올리며 동료에게서 얻은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연기를 한 모금 빨아 마시는 순간, 누군가와 마주쳤다. 교회 목사님이셨다. 담배는 등 뒤로 숨겼지만, 문제는 들여 마신 연기였다. 그는 숨을 참느라 인사도 못하고 도망을 치고 말았다. 담배 피운 일로 괴로워하며, 그날 이후 그는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청년회장이었는데.
그러던 어느 날 목사님이 만나고 싶어 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망설이다가 사택을 찾아갔다. 목사님은 환히 웃으시며 그를 맞이했지만, 그는 죄인의 심정이었다. 목사님은 놀랍게도 소주병과 담배를 상에 올려 놓으셨다. 그리고 소주를 한 잔 따라 주시더니 담배도 입에 무셨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골목에서의 담배 얘기는 꺼내지 않으셨다. “목사님이 나를 위해 소주를 마시고 담배도 피우시다니…” 훗날 그는 그 교회 장로가 되었고, 목사님의 추모집에 그 이야기를 담았다. 금주와 금연, 주일성수, 십일조가 기독교 신앙의 본질처럼 여겨지던 50년도 더 된 그 시절에, ‘사람’을 신앙의 목적으로 봤던 그 어른의 깨달음에 머리가 숙여진다. 이런 게 성육신(成肉身)이 아닐까.
최근 김동호 목사님이 어느 고시원 이야기를 SNS에 소개했다. 고시원에 사는 이들은 대부분 생활이 어렵다. 방값을 제대로 내지 못하거나, 아이들 급식비도 제대로 내지 못한다. 그런 이들을 위해 고시원 주인이 옥상에서 삼겹살 파티를 열어줬다. 그 이야기를 듣고는 자신도 “소주 몇 병과 삼겹살 좀 두둑히 사 들고 가서, 한 번도 마셔 본 적 없는 소주 한 두 잔쯤 같이 마시며 저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눈물 한 주름 흘려도 보고, 어깨 두드려 주며 죽을 때까지 죽지 말고 죽기 살기로 열심히 살아 이겨내 보자고 이야기해주고 싶다”고 했다. 이런 목사를 타락했다고 비판할 수 있을까?
내가 아는 어느 집사는, 새벽 기도 안 나오는 성도를 향해 타박하는 목회자를 향해 이렇게 받아친 적이 있다고 한다. “목사님, 매일 아침 지옥철 타고 출근해 보셨나요? 직장에서 상사에게 까이고, 돈 걱정에 잠 못 이뤄본 적 있나요? 영업 실적에 목 매고 술 접대에 속 쓰려본 적 있나요? 퇴근 후 소주 한 잔 안 마시고 버텨본 적 있나요? 그런 거 다 알면서도 새벽 기도회 안 나온다 뭐라 하신다면 할 말은 없습니다만…”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슬피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않는…
후배인 목사 한 분이 얼마 전 부인을 먼저 떠나보냈다. 어려운 형편에서도 부인은 남 돕는 데 열심이어서 다섯 군데나 정기적으로 후원을 해왔다. 장례를 치른 후 그는 부인이 후원해온 곳에 일일이 전화를 걸어 당분간 후원을 하기가 어렵다며 양해를 구했다. 사정을 들은 두 곳의 직원은 진심으로 애도하며 그동안의 후원에 고마워했다. 그런데 다른 두 기관은 사연을 듣고도 웬만하면 계속 후원해줄 수 없겠느냐며 강권을 했다. 남은 한 곳은 규모가 큰 기관인데, 사정 이야기를 듣더니 별 반응 없이 알겠다며 사무적으로 처리를 하더란다. 어려운 이들을 돕는 이들이, 어려운 이들에 대해 진정으로 공감하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12:15) 주님은 우리에게 ‘공감(共感)’을 강조하신다. 공감(empathy)은 내가 상대방 입장이 되어 똑같이 이해하고 생각해보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율법만 따지셨다면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의 공감 덕분에 오늘 우리가 산 것이다.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마11:17) 지금 우리 사회는 지나치게 각박해지고 있다. 교회의 지도자들도 자신들과 조금만 입장이 다르면 이단시한다. 내가 상대방을 공감하기보다, 상대방이 나를 공감하도록 강요하는 세상이다.
내 차에 접촉 사고를 낸 초보운전자에게 잘못 따지기 전에, 그가 얼마나 놀랐을지를 먼저 생각하며 위로를 해주자. 범죄자에게 추궁만 하기보다는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상황과 동기를 물어보자. 그렇게 하는 것이 공감이고 이웃사랑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