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은 양쪽 모두 강경파들에 의해서 휘둘리며 파국으로 치닫는 모습을 보여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중동의 전쟁은 아랍의 이슬람과 이스라엘의 유대교 내지는 미국의 기독교 등이 어우러진 이른바 종교전쟁의 양상 또한 배제할 수 없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두 나라 모두 동방정교회 소속의 나라들이니 기독교 국가 사이의 전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동방정교회는 1054년 서방교회와 분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대부분의 나라가 1차 세계대전까지 오스만 제국의 통치 아래 압제를 경험하였고 그나마 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그리스를 제외한 동구권은 소련에 의해 점령되어 있었는데 소련의 붕괴 이후 비로소 세계 신학계에 복귀하였다. 동방정교회의 신학은 전체적으로 가톨릭교회보다 신비적 색채가 짙다고 보면 무난할 것 같다. 예컨대 가톨릭의 화체설을 일찌감치 이들은 받아들였고 성상이나 성화를 숭배한다.
787년 열린 2차 니케아 공의회는 성상숭배를 가결한 교회회의로 유명하다. 이 부분에 대해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실로 동방교회의 사절인 요한은 이에 열중한 나머지, 형상 예배를 거절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 도시에 매음굴을 허용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만장일치로, 모든 이단자보다 사마리아인들이 더 나쁘고, 이들 사마리아인들보다는 형상 반대자들이 더 나쁘다고 결정하였다”(『기독교 강요』, I.11.16)
이른바 동방정교회는 1차에서 7차까지의 공의회 결정을 받아들인다. 반면에 우리 개신교에서는 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4차 칼케돈 공의회(451년)까지의 결정만을 수용한다. 가톨릭교회는 비록 성상숭배 문제로 동방교회와 1054년 분열하였지만 성상숭배를 수용하고 있는 입장이며 21차에 해당하는 2차 바티칸 공의회(1962~65년)까지의 모든 교회회의의 결정을 수용하고 있다.
가톨릭과 함께 서방교회에 속해있는 개신교회가 주류를 이루는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래도 동방교회는 생소할 수밖에 없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마포에 있는 성니콜라우스 성당을 비롯한 5개의 동방정교회가 있고 5천 명의 신자가 있다고 한다. 1900년 러시아 공사관을 통해 포교되었다가 러시아가 1905년 러일전쟁에서 패배하고 1917년 볼세비키 혁명으로 공산화되며 그 명맥이 끊어졌다가 6·25에 참전한 그리스의 정교회에 의해 다시금 포교가 이루어졌다.
『죄와 벌』의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배경이 되는 것이 정교회이며 동방교회 사제인 게오르규의 소설을 영화화한 안소니 퀸 주연의 『25시』의 배경이 정교회라고 할 수 있다. 조금은 관심을 가지고 살필 필요가 있는 부분이다.
칼빈은 서방 전통에 속하는 신학자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나 칼빈에게 있어서 어거스틴이 가지는 권위를 생각하면 어거스틴으로 대표되는 서방 신학에 칼빈이 속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할 것이다. 이것은 동·서방 교회 분열의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하였던 필리오케 (filioque) 논쟁과 관련하여 칼빈이 『기독교 강요』에서 분명하게 어거스틴으로 대표되는 서방교회의 입장을 지지하고 있음을 볼 때 이론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삼위일체론에 있어서는 사정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칼빈의 삼위일체론은 어거스틴과는 다른 체계를 보여주고 있다. 즉 칼빈은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보다는 동방의 교부들인 갑바도기아 교부들의 삼위일체론에서 더 많은 영향을 받았다. 칼빈이 갑바도기아 교부들의 저작들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은 틀림이 없으나, 칼빈이 어떻게 어거스틴으로 대표되는 서방 전통에 확고하게 서 있으면서도 갑바도기아 교부들의 글에 그토록 친숙할 수 있었는지는 수수께끼다. 의심할 것도 없이 어거스틴 자신이 후대의 자신의 추종자들보다도 훨씬 더 갑바도기아 교부들에 가까웠음을 지적하며 칼빈에게 있는 이런 영향을 설명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일 수는 없다.
최근의 연구는 칼빈이 위대했던 동방 교부들의 저작 중 일부를 입수할 수 있었으며, 칼빈과 그의 추종자들이 크리소스톰(John Chrisostom, c. 347~407)의 설교 기술 같은 것들을 이따금씩 사용했음을 지적함으로써, 칼빈과 동방 교부 사이의 접촉 가능성을 발굴해 내기 시작했다. 그 결과 겉으로 보기에 조금도 비슷한 점이 없어 보이는 두 전통 사이에 유사성이 존재하고 있음이 학자들 세계에서 받아들여지게 되었지만 그 진짜 이유는 여전히 불분명한 채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