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사마리아인 같던 증조부의 정신 이어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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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사마리아인 같던 증조부의 정신 이어지길”
  • 김태현 기자
  • 승인 2024.08.12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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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한경 선생 마을 농민 주민세 대납…현재 물가로 환산 시 1억원 이상
후손들, “등록문화유산 등재 통해 증조부의 이웃 사랑 이어지길 희망”
전라남도 담양군 대전면 농협 앞에 세워진 최한경 선생 송덕비. 최한경 선생은 일제시대 당시 흉년이 들자, 인근 지역 농민들의 주민세를 대납해 기독교인으로서의 모범을 보였다.
전라남도 담양군 대전면 농협 앞에 세워진 최한경 선생 송덕비. 최한경 선생은 일제시대 당시 흉년이 들자, 인근 지역 농민들의 주민세를 대납해 기독교인으로서의 모범을 보였다.

최영철 전 국토교통부 차관보(잠실교회 안수집사)의 증조부 최한경 선생이 일제강점기 당시 전국적으로 흉년이 들었을 때 마을 농민들의 호세(戶稅, 주민세)를 대납해 주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전라남도 담양군 대전면 중옥리에서 출생해 평생 그곳에서 터전을 일구었던 최한경 선생은 일제강점기였던 1921년 흉년으로 인해 지역 농민들이 호세(戶稅, 주민세)를 납부하지 못하자 전체 1,194호 농가의 주민세를 대납해 주었다.

최한경 선생은 1,194호 농가의 주민세 1천3백5십9원9십전(1,359원90전)에 해당하는 쌀 271석을 대납했는데 당시 쌀 한 석은 5원이었다. 쌀 한 석은 160kg으로 총 43,360kg이다. 현재 물가로 쌀 10kg을 25,000원으로 환산했을 때, 1억8백4십만원이나 되는 금액이다.

최한경 선생의 이웃 사랑에 감동한 지역민들은 1923년 3월 20일 대전면 농협 앞에 ‘송덕비’를 세워 아름다운 이웃 사랑을 기리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은 세계성시화운동본부 사무총장 김철영 목사가 최근 후손들로부터 최한경 선생의 아름다운 미담을 전해 들은 후 세상에 알려졌다. 김철영 목사는 전남 담양군 대전면 중옥리에 위치한 최한경 선생의 생가와 1923년 대전 면민들이 최 선생의 은덕을 기려 세운 송덕비 현장을 찾아 아름다운 선행을 직접 확인하고 널리 알렸다.

최한경 선생의 증손녀인 최호자 권사(서울대 약대 CCC 나사렛형제들)는 “아버지로부터 증조부님에 대한 말씀을 많이 듣고 자랐다”며 “아버지가 해주신 말씀 중에는 이런 일화도 있었다. 어느 날 밤에 도적이 집에 들었는데 증조부님이 ‘밤손님도 손님’이라며 돈 꾸러미를 내놓으면서도 도적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등을 돌리고 계셨다. 이에 도적이 감동을 받아 무릎을 꿇고 사죄를 하면서 너무 형편이 어려워서 돈을 훔치게 되었다며 반드시 돈을 갚겠다고 했다 한다. 할아버지는 그만큼 어려운 사람의 형편을 이해하셨던 분”이라고 소개했다.

최한경 선생의 증손자녀들 중 영선은 화순 동복중학교 교장을 역임했고, 원경은 충남방직에서 재직했으며, 영준은 (주)대우 임원을 지냈다. 증손녀 황자는 서울대 공대를 졸업한 유종호 목사(CCC 김준곤 목사 비서실장 역임)의 사모로 남편의 대학생선교 사역을 내조했다. 증손녀 영신은 미국 하와이대 일본어학과 교수를 지내며 CCC 지도교수를 맡아 대학생 선교사역을 협력했다.

증손녀 최호자 권사의 남편 전용태 장로(법무법인 로고스 설립자)는 춘천, 청주, 인천, 대구지검 검사장을 역임하면서 재단법인 성시화운동에 헌신했다. 전용태 장로는 성시화운동 이사장과 세계성시화운동본부 초대 총재, 대표회장으로 국내외 도시 단위를 순회하며 행복한 시민, 건강한 가정, 깨끗한 도시를 만드는 일에 앞장서 왔다.

전용태 장로는 “아내의 증조부님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길을 가다가 강도 만난 사람을 치료해 주었던 ‘선한 사마리아인’ 같은 분이셨다”며 “그 집터와 송덕비가 담양군 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되어 나라사랑과 이웃사랑의 정신을 되새기는 교육의 현장이 되었으면 한다”고 전했다.

한편 일제강점기를 연구한 학술논문에 의하면 1910년대 토지조사사업을 통해서 일제가 농민들의 토지를 탈취하면서 소작농의 토지경작권마저 박탈해 반봉건적 지주제를 확립시키고 농촌의 계급구조를 지주와 소작농으로 양극화시킨 것으로 밝혀졌다. 이로 인해 자소작농을 포함하여 전체적으로 약 80%에 이르렀던 일제강점기의 소작농들은 평균 5할을 훨씬 넘는 소작료 외에도 지조(地租) 및 각종 공과금, 용수료 및 수리조합비, 토지공사 및 수선비, 마름의 보수, 지주와 마름에의 접대비 및 증여물 등을 제하고 나면 전체 생산물의 약 24∼26%밖에 얻을 수 없었다.

이처럼 농민들이 무척 곤궁하고 곤란한 상황에 처했을 때 최한경 선생이 선뜻 사제를 털어 농가의 주민세를 대납해주었던 것은 이웃을 자신의 가족 같이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할 수 없는 통 큰 결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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