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 독립과 결혼한 김마리아의 조국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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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독립과 결혼한 김마리아의 조국 사랑
  • 김태현 기자
  • 승인 2024.08.07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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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 유산을 찾아서 (18) // 여성 독립운동가 길러낸 ‘정신여학교’(하)

“나는 대한 독립과 결혼했다.”

일생을 독신으로 살며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여성이 있다. 정신여학교의 학생이자 교사였던 김마리아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정신여학교의 가르침대로 조선 여성으로서 정체성을 가지고 독립운동에 전념했다.

정신여학교를 졸업한 김마리아는 모교에서 교사로 재직했다. 1913년 정신여학교 교장 루이스 선교사의 지원으로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1919년 2월 8일에 도쿄에서 조선 유학생들은 조선의 독립을 선언했다. 2.8 독립선언 당시 김마리아도 도쿄에서 유학 중이었다. 2.8 독립선언을 본 후 김마리아는 대한 독립을 위해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헌신하겠다고 마음 먹는다. 

졸업이 1년밖에 남지 않았지만, 김마리아는 학업을 포기하고 귀국해 3.1운동을 준비했다. 평소 조선식 의복만을 고집했던 김마리아지만 “내게 이 사명은 졸업장을 따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고 값진 일이다. 여성이라 검열과 수색이 덜 할 테니 내가 독립선언서를 조국으로 가져가 전파하겠다”라며 ‘독립선언서’ 10여장을 일본 옷의 띠인 ‘오비’ 속에 숨겨 귀국했다. 

귀국한 김마리아는 3.1운동에 참여하다가 일본 형사에 붙잡혔다. 심한 옥고를 치르다 풀려난 김마리아는 다시 모교인 정신여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했으며, 여성 항일운동을 주도하고자 정신여학교 학생 및 졸업생과 함께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추대됐다. 

애국부인회는 군자금을 모으고 모금한 돈을 상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보내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활동 2달이 채 되지 않았을 때 약 6,000원이라는 거액을 군자금으로 상해임시정부에 보내기도 했다.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던 애국부인회 회원들은 밀고자로 인해 체포됐다. 이들은 모진 고문 속에서도 기도회를 하고 찬송을 부르며 더욱 신앙생활에 매진했다. 이러한 모습을 본 한 일본 여간수는 양심의 가책을 받고 사표를 냈으며, 몇몇 죄수들은 그곳에서 애국부인회 임원들에 의해 복음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결국 3년형을 선고받았던 김마리아는 고문 후유증으로 인해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상해로 탈출해 망명했다. 국외에서 독립운동을 이어가던 그는 1935년 다시 귀국해 전도와 신학 발전에 힘쓰다 1944년 사망했다. 그토록 바라던 대한 독립을 1년 앞둔 시점이었다. 비록 대한 독립을 두 눈으로 보지 못했지만, 추후 그의 공로를 기리며 정부는 건군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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