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는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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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는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입니다”
  • 영광=이인창 기자
  • 승인 2024.07.17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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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의 땅, 순교 발자취 따라(상)

6.25 당시, 야월교회 전 교인 65명 순교 피해
인민군, 염산교회 77명 성도들 돌 매달아 수장

익숙하지만 낯선 곳이다. 초중등 시절 10여년을 전남 영광에서 성장했던 터라 염산면이나 신안군 증도, 임자도와 같은 지명은 익숙했다. 실제로 방문했던 적도 여러 번이었지만, 그곳이 순교의 역사를 간직한 아픔의 땅인 줄 한동안은 잘 몰랐다. 교계 언론에 종사하며 믿음의 선배들을 조명하는 기사를 쓰면서 실제 어떤 곳인지 알게 됐고, 언젠가는 순교성지를 찾아가리라 다짐했던 기억이 난다. 

마침내 지난 10~11일 일정으로 남도의 땅, 순교의 역사를 찾아갈 기회가 생겼다. 한국교회총연합(대표회장:장종현 목사)이 마련한 근대 기독교 문화유산 답사단 일원으로 참여하게 된 것. 이른 아침 용산역에서 KTX를 타고 광주송정역에 도착한 후 버스를 타고 약 1시간을 달려 도착한 순교성지는 6.25 당시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전 교인이 믿음을 고백하며 순교를 선택한 영광군 염산면 야월교회였다. 

전남 영광군 야월교회 앞마당에 세워줘 있는 65인 순교기념비.

“정말 일어났던 역사입니다”
지금은 차를 타고 쉽게 찾아갈 수 있지만, 당시에는 야월도라는 섬이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배를 타고 법성포로 가던 유진 벨(Eugene Bell) 선교사가 1908년 설립한 야월교회. 차에서 내리자 널찍한 교회 앞마당이 눈에 들어온다. 여느 농촌 교회와 비슷한 느낌이다. 예배당을 마주하며 제법 규모가 있는 ‘순교기념탑’이 발길을 먼저 이끈다. 교회 뒤편에 보이는 예배당보다 큰 규모의 ‘기독교순교기념관’도 궁금한 마음을 자아낸다. 순교기념관 입구에 새겨져 있는 “순교는 죽음이 아니고 새로운 시작입니다”(Martyrdom is starting) 글귀에 한참 동안 시선이 머문다. 

순교기념관을 방문한 일행을 맞이한 이는 야월교회 최종한 원로장로이다. 자신이 직접 겪었던 순교 상황을 생생하게 들려주며 아픔의 역사를 증언했다. 

야월교회 성도들은 일제 신사참배에 끝까지 반대하다 스스로 교회 문을 닫을 정도로 민족의식이 투철했고, 가정에서 끝까지 예배를 드리며 말씀대로 살고자 애썼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한 상황에서도 교인들의 신앙은 굳건했다. 

국군이 낙동강에 최후 방어선을 구축했을 때, 영광군 역시 인민군의 집중 피해를 입었다. 이미 잠입해 있던 빨치산 ‘김상용’과 일당이 가세하면서 무고한 교인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기념관에 걸려 있는 순교자 65명 이름을 눈길 가는 대로 읽으며 가슴이 저며오는 것을 느낀다. 

인민군은 야월교회를 습격해 기독교인들을 색출했다. 음력 9월부터 10월까지 전 교인 65명을 찾아내 산 채로 매장하거나 바다에 수장시킨 잔혹함에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최종한 장로는 “직접 겪은 100% 진실이 15분 영상에 담겨 있다. 내가 살아서 증언해 만든 영상”이라고 다큐영상을 소개했다. 6.25 당시 최 장로는 9살이었다. 혹시나 과장되거나 왜곡된 것으로 생각할까 걱정되는지 노(老) 장로는 애가 타도록 정말 일어났던 일이라는 말을 반복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얼굴이 있어요. 어린이소년단을 같이 했던 정일성 집사님의 딸이에요. 잔혹하게 교인들은 죽이던 인민군이 이 아이를 살려줬는데, 이틀 후에 다시 불러내 업어갔답니다. 아이는 자신이 왜 끌려가는지 아는 거죠. ‘오빠! 살려줘요’ 외치는 소리가….” 

야월교회 최종한 원로장로가 순교기념관에서 6.25전쟁 학살 당시 기억을 떠올리며 순교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65명 성도들이 순교할 당시 최 장로는 9살로 교회를 다니지 않아 살 수 있었다.

죽어가는 순간에도 천국 소망을
야월교회를 떠나 발길을 옮긴 곳은 불과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염산교회이다. 1939년 야월교회에서 분립한 이곳에서도 성도들은 신앙을 지키다 목숨을 잃었다. 사람이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지, 얼마나 죄인인지 알려준다. 보고 들을수록 고통이 밀려온다.

6.25 때 영광에서만 194명이 순교했고, 이중 77명이 염산교회 성도들이었다. 최성남 담임목사가 순교기념관을 안내하며 순교 역사를 아주 상세히 설명해주었다. 

최 목사는 “북한군이 진입해 예배를 드리지 못하도록 가로막았고, 교회를 담임하던 김방호 목사님이 호통을 쳤지만 소용없었다. 김 목사님은 밤이면 인민군의 눈을 피해 교인들 집을 돌면서 말씀을 전하고 성도들을 돌보셨다. 목선을 구한 교인들이 피난을 권유했지만 ‘목사가 어떻게 교회와 성도들을 놔두고 목장을 떠날 수 있겠냐’며 거부하셨다”고 들려주었다. 

순교 역사를 기록한 다큐멘터리를 시청한 후 최 목사는 우리를 교회 내 기념관으로 안내했다. 교회 마당에는 옛 염산교회 예배당이 재현되어 있었고, 실제 순교자들을 합장한 묘지가 푸른잔디에 덮여 있었다. 순교기념비에는 77인 순교자 명단이 빼곡하게 적혀 있다.

인민군은 국군이 들어올 때 사용할 태극기를 만들었던 청년 기삼도를 가장 먼저 살해했다. 염산교회 첫 순교자였다. 해가 지는 어느 날 예배당에 불을 지른 인민군은 본격적으로 교인들을 잡아 학살하기 시작했다. 

노병재 집사의 식구 9명은 몸에 돌을 매달아 바다에 빠뜨려 목숨을 앗아갔다. 노 집사의 일가 23명이 같은 날 죽임을 당했다. 김방호 목사는 아내와 4명의 자녀, 손녀가 몽둥이에 맞아 순교했다. 김 목사는 맞는 순간에도 찬송을 불렀고, 허상 장로와 이순심 집사는 인민군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다 순교했다. 

“1950년 10월 3일부터 3개월 동안 인민군과 빨치산은 77명 성도들을 잡아 죽였습니다. 어린아이만 28명입니다. 유엔군이 영광으로 진입할 때 염산교회 청년회가 환영회를 주도했는데, 보복한 겁니다. 새끼줄로 엮었다고 알려지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한 사람 한 사람 무거운 돌을 매달아 잔혹하게 수장시켰습니다.”

최 목사가 언급대로 북한 인민군을 교인들에게 붙잡아 무거운 돌을 매단 채 설도항 수문으로 걸어가게 했고, 그 자리에서 밀어버렸다. 끝까지 죽이겠다는 의지였는지 교인들을 향해 총격을 가하고 대검으로 찌르기도 했다. 김만호 장로와 박귀덕 권사의 4명의 딸 옥자(15살), 금자(11살), 신자(9살), 미자(3살)도 이날 사망했다. 

염산교회 순교기념관에 인민군이 성도들을 수장시킬 때 사용했던 돌덩이가 전시되어 있다. 

최 목사의 설명에 따르면, 옥자는 무서워 우는 미자를 업고 끌려가던 중 “우리는 천국에 가고 있으니 울지 말아”라고 달랬고, 이 소리를 듣던 인민군이 두 아이의 목을 베어버렸다고 한다. 감히 생각지도 못한 설명을 듣는 순간 가슴이 떨리고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진다.

염산교회 성도들의 시체가 앞바다를 떠다닐 때, 염산교회 출신 신학생 안종렬 전도사가 돌아왔다. 23살의 안 전도사는 교인 한명 한명의 시신을 찾아 수습했다. 바위틈에서 목이 없는 어린 자매의 시신도 수습해주었다. 

순교기념관에는 안종렬 목사의 동생으로 예장 통합 총회장을 지낸 안영로 목사가 “형님은 사체에서 나는 독한 냄새 때문에 코피를 흘려가면서도 모든 순교자들의 시신을 찾아 묻어주었다”고 고백한 인터뷰 기사가 게시돼 있었다. 

염산교회 순교자들이 합장되어 있는 묘지와 순교기념비.

“부모를 죽인 원수를 갚으러 왔습니다”
“교회는 순교자의 피 위에 세워진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염산교회 김방호 목사의 가족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김익 전도사는 1951년 4월 염산교회 교역자로 부임해 다시 교회를 세웠다. 처음 교인들 앞에서 설교하기에 앞서 전한 김 전도사의 말이 큰 울림을 준다. 

“저는 김방호 목사의 둘째 아들입니다. 내 아버지와 내 어머니, 형제들이 북한 인민군에게 모둥이로 맞아 처절하게 죽음 당한 곳이기에 생각하기 싫은 곳이지만, 나는 이곳에 원수를 갚으러 왔습니다. 원수 갚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이 예수님을 믿게 해서 천국 가게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참된 원수 갚은 일 아니겠습니까? 여러분도 저와 함께 이 일에 힘을 합쳐 주세요.”

순교의 상처가 얼마나 컸는지 야월교회는 한동안 교회가 폐쇄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새로운 교역자가 부임했지만, 주민들은 “하나님이 있다면 어떻게 종자 하나 없이 죽게 만들 수 있느냐”고 비난했다. 더 이상 복음이 심기지 않을 것 같은 곳에 다시 열매가 맺혔고 1975년 야월교회는 다시 문을 열었다. 

최 장로는 “가해자 후손들도 지금 마을에서 살고 있고, 누구인지 나만 알고 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지금 같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귀뜸했다. 순교의 고난 속에서 교회가 다시 세워질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른 용서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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