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가 맺어야 할 열매
갈라디아서 5:22~23
찬송: 496장
히브리인들의 문학구조에 의하면 본문은 하나님과 관계에서 맺어야 할 세 가지 열매와 사람과 맺어야 할 열매 세 가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에 대해 맺어야 할 열매 세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관계에서 맺어야 할 열매 세 가지의 특징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사람과의 관계에서 맺어야 할 열매 세 가지의 특징이 있습니다. 먼저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으려면 오래 참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비로우시듯 우리도 자비롭고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야겠습니다. 그러면서 양선 즉 착한 행위로 대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5장 9절에서도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이라고 했습니다.
성도가 자신에게 맺어야 할 열매는 충성과 온유, 절제입니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 자기가 맡은 일에는 책임감을 가지고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또한 온유한 성품을 가져야 합니다. 온유한 성품은 인격의 변화를 말합니다. 마태복음 11장 29절에 보면 예수님도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맺어야 할 열매는 절제입니다. 말과 행동에 있어 자제할 줄 아는 성도가 아름다운 성도일 것입니다. 오늘도 성령의 도우심으로 성령의 열매 맺는 하루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오늘의 기도
오늘도 성령의 열매가 있는 성도가 되게 하소서!
어찌 낙심하며 어찌 불안해 하는가
시편 42:5
찬송: 413장
시편 42편은 ‘고라 자손’이 쓴 시입니다. 칼빈은 다윗이 이 시를 쓰고, 고라의 자손이 이 시를 노래했다고도 생각합니다. 칼빈의 견해대로 시편 42편의 시인이 다윗이라면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다윗은 장인 사울 왕의 살해 위협에 쫓기면서도 의연합니다.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예루살렘 성을 도망쳐 나올 때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런 상황에서 지어진 시가 시편 42편이라고 추측합니다.
다윗은 원래는 낙심하지 않던 사람, 원래는 불안해하지 않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낙심하고 불안해합니다. 그래서 “어찌하여”라고 말합니다.
다윗이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을 때는 ‘낙심’도 ‘불안’도 다윗의 마음에 들어와 있을 공간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멀어지면, 마음에 빈 곳이 생깁니다. 그곳으로 ‘낙심’도 ‘불안’도 찾아옵니다. 하나님이 차지해야 할 만큼의 공간이 비어 있습니다. ‘낙심’에서, ‘불안’에서 벗어나는 길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 세상의 어떤 ‘낙심’과 ‘불안’도 내 마음의 공간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설사 들어와도 머물 수 없습니다. 혹시 ‘낙심’하고 계십니까? ‘불안’하십니까? 하나님과 관계를 점검하십시오. 혹시 하나님과 관계가 멀어져 있다면 다시 회복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가 세월이 갈수록 더욱 깊어지게 하옵소서.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다
사무엘상 14:4~7
찬송: 391장
하나님의 도우심을 끝까지 믿고 사무엘이 올 때까지 기다리지 못한 사울. 여전히 블레셋 군대는 믹마스에 진치고 있는 위태로운 모습으로 사무엘상 13장은 마무리됩니다.
그러나 사울에게 요나단이라는 아들이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요나단은 그저 부관 한 명만을 대동하고 적진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런데 그의 그런 가상한 용기와 결단에도 불구하고 적과 요나단 사이에는 커다란 장애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험한 바위’였습니다. 여기서 ‘험한 바위’는 원어적으로 ‘이빨 같은 바위’를 의미합니다. 그 바위들이 얼마나 험하기로 유명했는지 사람들이 그 바위를 가리켜 부르는 이름이 있을 정도입니다. 하나는 ‘보세스’(미끄럽다)이고 다른 하나는 ‘세네’(가시)입니다.
미끄러워서, 그리고 가시와 같아서 도저히 오르기 힘든 그 험한 바위 능선을 요나단이 오르고 있습니다. 그의 마음에 이런 믿음의 고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6하) 이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에 앞을 가로막는 험한 바위도, 그리고 그 너머에 기다리고 있을 블레셋 군대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믿음 있기 원합니다.
•오늘의 기도
우리 앞에 수많은 대적이 있다 해도, 험한 바위가 가로막고 있어도,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음을 믿고 나아가는 우리 되게 하소서.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
요한복음 2:13~25
찬송: 348장
하나님은 국가나 사회가 범죄하면 교회를 쳐다보시고 의인들을 바라보십니다. 그리고 심판을 면케도 하십니다. 그러나 성전이 성전다움을 잃으면 마침내 온 세상을 외면하실 것입니다. 성전은, 장사하는 집이 될 수 없으며 정쟁의 현장이나 사리사욕의 현장, 유흥의 현장 혹은 인본적 파당의 현장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특별 행동에 어떤 특별한 표적의 근거를 요구하는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유대인들이 주님의 이 말씀을 이해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것은 주님 자신의 육체 부활을 의미한 것이었습니다. 성전 안에 어떤 세속적인 기운이나 영향력이 아니라 부활의 권능이 표적으로 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마 12:38~40). 교회에 늘 있어야 할 특징은 눈에 보이는 물질이나 교세, 조직, 전통이 아니고 주님이 보여주신 부활의 권능과 부활의 표적입니다.
유월절 복음 사역의 결과,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보고 믿었지만 주님은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오직 성전을 아버지의 표적으로, 부활의 권능으로 이루어가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부활의 표적이 늘 나타나도록 힘 있게 주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기도
빛과 소금되는 교회로서 근본적으로 사람의 도움이나 인정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표적이 늘 나타나게 하옵소서.
더 사랑하여
창세기 29:18~20
찬송: 314장
사역을 하면서 힘들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오늘 본문을 묵상하며 힘을 얻고 도전을 받습니다. 사랑한다고 해서 힘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사랑하면 얼마든지 이겨 낼 수 있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말씀하시며 사랑하기 때문에 독생자를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들을 아끼지 않고 주신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들을 죽음에 내어주는 아버지의 마음이 어찌 아픔이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도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분명한 이유가 있다면? 우리를 사랑하셔서입니다. 우리를 너무 너무 사랑하셔서 그것도 죄 많은 나를 위해 십자가의 저주를 감당해 주셨습니다.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큰 사랑과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 앞에서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매우 이기적인 사랑의 고백에 불과하다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심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심 같은 그런 사랑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저 나의 초라한 사랑의 고백을 인정해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이라고 생각하며 힘듦보다는 더 사랑하기에 이겨내며 힘쓰는 삶이 되길 소망합니다.
•오늘의 기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죽으셨으니 그 사랑에 반응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아름다운 가정
시편 128:1~6
찬송: 559장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가정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원하는 방향이 아닐지라도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그가 기뻐하시는 일, 그가 영광 받으시는 일에 초점을 맞출 때, 하나님은 그런 가정을 축복할 줄로 믿습니다.
저는 우리 가정의 신앙 개척자였습니다. 주변에 아무도 예수를 믿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40년 신앙생활을 돌아보니까 아들, 딸, 손자, 손녀까지 한 교회를 섬기는 믿음의 가정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제가 깨닫게 된 것은 이것입니다. ‘나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그렇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에 주시는 축복은 무엇일까요? 2절 말씀을 보니까 “형통하리로다”라고 말씀합니다. 또 3절에 “감람나무 같으리로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6절에 “예루살렘의 번영을 보며”라고 하십니다. 무슨 말입니까? 나로 인해 내 주변이 잘된다는 말입니다.
사람을 두려워하거나 사람에게 잘 보일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고, 믿음으로 살면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은혜로운 역사들이 우리 앞에 펼쳐질 줄 믿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나와 내 가정 더 나아가 나의 모든 주변까지 잘 되고 형통한 은혜로 넘쳐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의 기도
주님께서 주신 귀한 가정이 믿음 안에서 형통하길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