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시론] “성(聖)과 속(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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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시론] “성(聖)과 속(俗)”
  • 강석찬 목사
  • 승인 2024.06.05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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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찬 목사
강석찬 목사

물은 모든 생물을 살린다. 사람은 돌멩이를 먹을 수 없다. 생수(生水)를 담은 그릇에 돌멩이를 하나씩 넣어보자. 생수는 돌멩이의 개수가 늘어감에 따라, 돌멩이에 자리를 뺏겨 결국 그릇에서 넘쳐흐르게 된다. 생수는 제 역할을 할 수 없게 되고, 돌멩이로 가득 채워진 그릇은 사람에게 물을 제공할 수 없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생수(生水)라 하셨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생수를 담은 그릇이다. 그래서 교회는 거룩(聖)하다. 거룩해야 옳다. 교회가 거룩하다면 반드시 갖추어야 할 것이 있다. 생수인 예수 그리스도를 담고 있어야 한다. 만약 거룩해야 할 교회 안에 돌멩이(俗)가 가득 채워져 있다면, 거룩한 교회도 아니며, 생명을 살리는 곳이 될 수도 없다. 사람은 돌을 먹으며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사탄도 예수님을 시험하면서 돌을 빵으로 바꾸어 먹으라 하였다.

루돌프 오토(Rudolf Otto)는 제1차세계대전 후, 생과 사를 넘나드는 전쟁 이후의 정신적 공허함에 영적인 의미를 갈구하는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북아프리카 모로코의 오래된 시나고그에서 우연히 유대인들의 낯선 기도를 들으면서 성스러움을 체험하고 ‘성스러움의 의미’라는 책을 1917년에 출간했다. 그는 진리(眞), 선함(善), 아름다움(美), 성스러움(聖)은 인간이 지향하는 가치라 했다. 여기에서 ‘성스러움’은 어떻게 우리에게 포촉(捕觸)되고, 그 느낌은 어떤 것인지 질문하면서, 성스러움을 느끼게 되면 절대적 대상 앞에서 ‘두려운 위압성’을 느낀다고 했다. 쉽게 표현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현상, 이것이 성스러움이라 했다. 하나님이 두려우면, 자연스럽게 하나님 앞에서 ‘겸손(謙遜)’하게 된다. 하나님 앞에 선 존재로 사는 길은 끝없이 자신을 돌아보며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기까지 낮추고 낮추며 수행하는 것이다.

세계의 모든 종교의 힘은 진리 그 자체에 있다. 종교의 영향력은 진리를 따르는 사람의 삶을 통해 드러난다. 진리를 따르는 삶은 수행(修行)이다. 결국 수행을 통해 종교의 본성이 드러나야 제 역할을 할 수 있다.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연등회가 펼쳐졌었다. 그런데 부처님오신날을 사흘 앞둔 날(5월 13일), 조계사 앞 사거리에서 ‘EDM 난장’이 열렸다. 수행 종교의 세속화 현장이었다. 세속(世俗)을 떠나기 위해 깊은 산 속에 절을 짓고 수행하는 종교가, 세속 안으로 들어오는 변화라고 할 수 있겠지만, 떠나야 할 세속 안으로 들어와 무엇을 얻으려는 것인지 묻게 된다.

문제는 기독교에도 있다. 부활절 거리 행사가 불교의 연등회처럼 치러졌었다. 타 종교 행사를 흉내 내며 무엇을 보여주려 했을까? 하나님께서 보여주는 것으로 기뻐하셨을까? 영광을 받으셨을까? 왜 자꾸만 보이는 것에만 목을 매다는 것일까? 속 빈 강정처럼, 빈 깡통이 소리만 큰 것처럼, 세상(俗)과 같아지려 하는 것일까? 교회가 위기이다. 원인은 단순하다. 교회가 시대의 흐름에 따라야 교세를 유지할 수 있다는 유혹에 빠져, 생수(生水)를 담아둘 곳에 세속적인 돌멩이들을 쌓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성(聖)과 속(俗)은 섞일 수 있을까? 둘은 서로 섞일 수 없다. 섞여서도 안 된다. 교회가 하나님이 두렵지 않게 되면, 바벨탑을 쌓는 현상이 나타난다. 지성소를 가볍게 여기어 개방하기 시작하면, ‘성스러움’의 힘이 소멸한다. 교회 안에 들어와 박힌 돌이 되어가는 속(俗)의 뿌리를 뽑아버리고, 다시 생수(生水)인 예수님을 채워 거룩(聖)을 회복해야 한다.

예따람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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