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의 공지 앞에서도 이스라엘은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거듭된 악행이 이스라엘의 내면에 스며든 나머지 그들의 죄의식 자체를 마비시킨 형편이었습니다. 스스로 죄를 깨닫고 버리는 것이 불가능했기에 하나님께서는 예언의 말씀을 통해 그들의 죄를 드러내셔야만 했습니다. “내가 이스라엘을 치료하려 할 때에 에브라임의 죄와 사마리아의 악이 드러나도다. 그들은 거짓을 행하며 안으로 들어가 도둑질하고 밖으로 떼 지어 노략질하며 내가 모든 악을 기억하였음을 그들이 마음에 생각하지 아니하거니와 이제 그들의 행위가 그들을 에워싸고 내 얼굴 앞에 있도다”(7:1~2) 참된 회개는 죄를 깨닫고 시인하는 데서 시작되는데, 위선과 가장에 익숙한 마음은 죄를 외면합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죄가 가져온 파괴적 결과와 죄의 대가인 심판을 직면하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죄인은 자신의 죄만이 아니라 남들의 죄 역시 죄가 아니라고 옹호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의 성도들을 향한 편지에서 이같은 죄의 기만성을 철저히 해부해 보여줍니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롬 1:28~32) 주전 8세기 사마리아와 주후 1세기 로마는 물론, 그로부터 이천년을 지난 오늘 대한민국 역시 이같은 모습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무신론자, 반기독교주의자만이 아닌 신자를 자청하는 이들이 성경이 죄라 선언하는 행동들을 저지르고 옹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을 멀리하고 죄에 빠져도 그들을 각성시키기 위해 자신을 던지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시대는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름부으신 왕과 제사장, 선지자들이 바로 그 사명을 위해 세워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 앞에서 광란을 피워 하나님의 진노를 샀을 때 모세는 자신의 이름을 하나님의 생명책에서 지우실지언정 이스라엘을 구원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출 32:31~32).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한 고라의 무리로 인해 하나님께서 전염병을 보내셨을 때, 이스라엘을 치는 죽음의 사자 앞에서 아론은 속죄의 향불을 들고 ‘삶과 죽음의 사이’에 버티고 섰습니다. 이스라엘의 생명을 보호하는 직임을 최전선에서 수행했던 것입니다(민 16:46~48). 먼 훗날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 예수를 거부하고 십자가로 내몬 동족들을 향한 한 유대인의 탄식은 늘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1,3)
이스라엘의 영적 타락을 경고하기 위해 바람난 아내로 고통받는 역할을 자처했던 호세아의 피끓는 외침에도 백성들은 우상을 섬기고 방종에 빠졌습니다. 그들을 깨우치고 이끌어야 할 왕과 지도자들 역시 악행과 거짓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종교적 외피는 근사했지만 그들의 각성과 회개는 일시적이고 발작적일 뿐이었습니다.
처벌을 미뤄주시는 유예의 기간(grace period)은 빠르게 지나가는데, 과연 이스라엘은 너그러우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분께로 돌아올 수 있을지요.
백석대·구약신학
유선명 교수의 예언서 해설 (131) - “그들의 행위가 그들을 에워싸고 내 얼굴 앞에 있도다” (호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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