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 다섯 중 셋 중증장애…사업 실패까지 ‘신앙’으로 극복
평생 일군 장애인시설 ‘베다니동산’ 밀알복지재단에 ‘기부’
“예수님이 ‘보석’처럼 여기신 귀한 존재 ‘장애인’을 섬기는 사역은 소외된 이웃을 외면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길이었습니다. 부디 제가 천국 간 이후에도 하나님이 특별히 사랑하시는 장애인들을 향한 ‘사명’은 계속 이어지길 소망합니다.”
경기도 광주에 위치한 중증장애인 거주시설 ‘베다니동산’ 설립자 신현국 목사(84)의 간절한 바람이다. 지난 20여년간 가족들조차 외면한 수많은 장애인에게 따뜻한 보금자리를 내어준 그는 슬하에 장애인 자녀 셋을 둔 아버지이기도 하다.
신 목사의 고난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었다. 경제적 어려움은 말할 것도 없고 앞서 뇌병변을 앓던 아들과 장애는 없었지만 앞길이 창창하던 젊은 딸, 그리고 희귀병을 앓던 아내마저 먼저 하늘로 떠나보낸 아픔을 간직한 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목사’라고 소개하는 그는 최근 밀알복지재단에 베다니동산을 아무 조건 없이 통째로 기부했다. 굴곡진 인생사 야곱처럼 무수한 시련 속에서도 감사를 고백하는 신 목사를 만나 믿음의 여정을 들어봤다.
고난은 사명의 밑거름
“저는 평생을 장애인의 가족이자 가장으로 살았습니다. 한때는 그 고통이 너무 심해 죽을 결심까지 했지만, 결국 제게 보내주신 장애인들은 ‘하나님의 뜻’임을 깨달았습니다. 죽을 뻔한 영혼 구원받아 충성된 일꾼으로 살아온 건 바다보다 넓은 하나님의 은혜 덕분입니다.”
어느덧 인생 팔십 줄을 넘긴 신 목사의 말에서 장애인을 향한 넘치는 애정과 소명이 엿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신 목사의 일평생은 장애라는 단어와 가깝게 맞닿아 있다. 그를 제외한 가족 구성원 모두가 장애인이기 때문이다.
현재 신 목사의 자녀 5명 중 둘째 딸은 난치병인 근이양증으로 투병 중이다. 셋째 딸은 어릴 적부터 지체장애와 정신장애를 판정받았고, 미숙아로 태어난 넷째와 다섯째 아들 쌍둥이 역시 모두 뇌성마비를 앓았다. 이 가운데 넷째는 스무 살 이른 나이에 먼저 하늘의 별이 됐다. 건강했던 첫째 딸마저 위암으로 34살에 세상을 떠났고, 아내 역시 중병으로 별세했다.
불행의 연속이었던 가정사를 뒤로하고, 신 목사에게도 탄탄대로였던 시절이 있었다. 번듯한 집안에서 태어나 연세대를 졸업한 그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지만 사업을 물려받아 물질적으로 풍족한 생활을 누렸다.
그러나 사업이 망하면서 가세는 급격히 기울었다. 이 무렵 결혼해 가정을 꾸렸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자녀들의 장애 판정은 신 목사의 삶을 더욱 송두리째 흔들었다. 셋째 딸과 두 아들의 장애 진단에 큰 충격을 받았지만, 어려운 형편에 치료는 꿈도 못 꿀 사치였다.
나이 마흔을 넘겨 자녀들이 중증장애인이란 사실을 겨우 인정했다는 신 목사. 그는 절망스럽던 당시를 떠올리며 “한 고비를 넘어서면 또 다른 고비가 찾아와 나를 숨쉬기 힘들게 했다. 비통한 처지에 맨정신으로 버틸 수 없어서 하루하루를 술에 겨우 의지했다”고 회상했다.
“‘주여 저에게 왜 이런 고통을 주시나이까’란 비명이 절로 튀어나왔습니다. 젊은 나이에 도저히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부끄럽지만 극단적 선택도 수없이 고민했어요. 오죽하면 자녀들을 장애인 시설에 버릴까? 혹은 가족들과 다 같이 죽자 싶기도 했죠.”
하나님은 끝 모르고 방황하는 신 목사를 결코 내버려두지 않으셨다. 한국교회 안에 부흥집회로 성령의 불길이 뜨겁게 타오르던 시절, 아픈 자녀들을 둘러업고 치유집회를 다니다가 기적적으로 하나님을 만난 것.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잊고 지내던, 바로 그 하나님 말이다.
“하루는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하나님의 징계는 곧 사랑이라는 ‘히브리서 12장’ 말씀이 제 가슴에 탁 박히는 겁니다. ‘주께서 사랑하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무릇 징계가 슬퍼 보이나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는다’는 구절로 하나님은 탕자 같은 저를 깨우치시고 다시 품에 안아주셨어요.”
그날로 ‘믿음’ 안에서 고난의 이유를 받아들인 신 목사. 더 이상 예수님을 떠나 살지 않겠다고 다짐한 그는 총신대에 입학해 신학도의 길을 결단했다. 그리고 10년간 목회를 이어간 그는 98년도 넷째를 먼저 천국으로 보내면서 비로소 ‘장애인 선교’에 소명을 품고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중증장애인 거주시설 베다니동산의 역사가 시작된 순간이었다.
“하나님께서 제게 ‘장애인을 위해 살라’는 소명을 주셨어요. 사실 장애인과 가족의 아픔은 겪어보지 않으면 잘 몰라요. 이들의 남모를 고통이 제 눈에 들어왔고 위로와 희망을 주고 싶었습니다. 가난한 자 병든 자를 외면하지 말라는 주님의 명령을 따르는 길이기도 했죠.”
청지기적 소명 사역 잇길
베다니동산은 지난 26년간 이전과 확장을 거듭한 끝에 경기도 광주에 중증장애인들의 쉼터이자 섬김이들이 가족처럼 함께 생활하는 ‘신앙공동체’로 자리 잡았다. 이곳에서 신 목사는 장애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자립을 모색하는 훈련과 재활교육에 매진해왔다.
“성경 속 ‘베다니 마을’은 온갖 괄시와 천대를 받는 소외된 이웃과 약자들이 모여 산 곳이었지만 예수님은 누구보다 이곳을 사랑하셨어요. 세상에선 별 볼 일 없는 마을이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사랑이 넘치는 아름다운 동산이었던 거죠. 수많은 장애인이 예수님을 만나길 바라며 이름을 베다니동산으로 지었습니다.”
베다니동산에는 20여명의 중증장애인들이 모여 산다. 그러나 그동안 이곳을 거쳐간 장애인들은 세기도 힘들다. 물론 고충도 상당했다. 갑작스런 이상행동 등으로 정상적인 예배는 차치하고 재정적으로도 운영이 빠듯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하나님은 때를 따라 돕는 손길들을 넘치도록 부어주셨다. 사비를 털어 건축헌금에 보태준 천사부터 적기에 보내지는 후원금은 “하나님이 하셨다”는 말로밖엔 설명되지 않았다.
그는 “예레미야 33장 말씀처럼 하나님께 그저 부르짖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면 내 모든 형편을 다 아시는 주님이 늘 돌보아 주신다. 결코 가진 것이 많다고 행복한 것이 아니다”라며, 무엇보다 장애인들이 하나님을 만나 긍정적 변화를 보일 때 가장 보람됐다고 간증했다.
“말씀과 찬양을 계속 선포하면, 장애인들에게도 분명 복음이 흘러 들어가리라 확신해요. 대도시의 성도들로 붐비는 대형교회는 저와는 거리가 멀어요. 조금은 덜 가지더라도 춥고 배고픈 사람의 시린 손을 덥석 잡고 온정을 전하는 따뜻한 목회자로 언제까지나 기억되고 싶습니다.”
한편, 신 목사는 20년 넘게 눈물 어린 기도와 사명 그리고 헌신으로 일군 베다니동산을 2022년 밀알복지재단에 아무런 조건 없이 기부했다. 토지면적 727m², 약 260m² 규모의 건물로 중증장애인 20여명을 수용할 수 있다. 사실상 신 목사가 모든 걸 바쳐 이룬 재산을 모두 장애인들을 위해 남긴다는 의미다.
어느덧 팔순을 넘겨 여생을 정리하던 신 목사는 자신의 목숨처럼 사랑하는 중증장애인들과 자녀들을 믿고 맡길 ‘신뢰’할 만한 단체를 오랜 시간 기도로 찾아 헤맸다. 때마침 24시간 장애인복지시설을 기도로 구하던 밀알복지재단 상임대표 정형석 목사와 인연이 닿으면서 일이 일사천리로 성사됐다. 그는 순적했던 과정을 돌아보며 ‘하나님의 예비하심’이라 회상했다.
신 목사가 밀알복지재단 제3호 ‘유산기부자’로 이름을 올린 사실이 세간에 알려지면서 주위에선 존경과 박수가 쏟아졌다. 노후는 좀 편하게 살라는 시선도 있었지만, 신 목사는 당연한 일을 했을 뿐 조금의 미련도 없다고 말한다.
“베다니동산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셔서 지금까지 키우신 곳입니다. 제힘으로 이뤘다고 생각하면 아깝겠지만,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베푸신 기적입니다. 우리는 재물과 재능을 잠시 맡아 살다가 빈손으로 돌아가는 청지기일 뿐입니다.”
밀알복지재단의 손으로 옮겨간 베다니동산은 얼마 전 법인으로 전환됐다. 정부의 지원이나 예산도 기대할 수 있게 된 만큼 앞으로 장애인 친구들이 더 좋은 환경에서 여유롭게 지내길 기대한다는 신 목사.
그는 “제가 천국 간 이후에도 장애인들을 향한 사명이 이어지리라 믿는다”며 “부디 주님 앞에 섰을 때 ‘잘했다, 충성된 종아!’라는 칭찬과 인정을 받길 소망한다”고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