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까지 기독교인이나 기독교, 기독교회를 비판했던 헬라 철학자들, 곧 루치아누스(Lucian), 켈수스(Celsus), 코넬리우스 프론토(Fronto), 그리고 포르피리우스(Porphyrius)와 그들의 작품에 대해 소개했다. 이제는 이들에 대항하여 기독교 신앙을 수호하고 변호했던 교회 지도자들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기독교 신앙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이들을 호교론자(護敎論者)라고도 하지만 보통 변증가(辨證家)라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사상이나 철학으로 기독교 신앙을 변호하는 학문을 변증학이라고 말한다면, 자연과학을 통해 기독교 신앙을 변호하고 성경과 기독교회의 가르침을 정당화하는 것을 험증학이라고 말한다. 반면에 비교종교학을 통해 기독교 신앙을 변호하는 것을 엘렝틱스라고 말한다. 반드시 이렇게 기계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모든 노력은 불신과 세속사회에서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골 2:8) 기독교 신앙을 위협하는 이들에 대한 저항이자 반격이었다.
그런데 2세기부터 이런 변증가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기독교 신앙을 변호하고 옹호해야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기독교회는 이중적인 위기에 직면했다. 외적으로는 기독교에 대한 물리적 박해가 있었고, 내적으로는 이단이 출현했다. 특히 이교 철학자들이나 문필가들의 기독교 비판은 커다란 도전이었다. 기독교에 대한 제국의 박해와 함께 이교로부터의 도전에는 상당한 오해가 있었고, 또 내부에서 일어난 잘못된 가르침은 기독교 신앙의 혼란을 가져왔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 신앙을 체계적으로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이교 논객들에게 대항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황제나 원로원 의원들에게 기독교인들의 신앙과 생활을 변호하거나, 해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필요에 의해 자연스럽게 대두된 이들이 2세기의 변증가들이었다. 변증가들은 2세기 중엽부터 나타나 200년 혹은 250년 어간에 주로 활동했는데, 이들에 의해 기독교 신앙이 최초로 체계적으로 설명되기 시작하였다. 이런 기독교 신앙에 대한 해명이 결과적으로 교리의 발전을 가져오게 된 것이다.
이전 시대, 곧 1세기 말과 2세기 초반에 활동했던 사도교부들(Patres Apostolici)도 문필활동을 전개했지만 문서의 내용이 목회적 동기에서 기록된 목회서신이라고 할 수 있고, 어떤 특수한 교리적 기초를 확립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변증가들은 정치적 박해, 이단의 출현, 그리고 이교도들의 이론적 공격에 대항하여 기독교 신앙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과정에서 교리의 발전을 가져오게 된 것이다.
오늘 우리가 말하는 변증(辨證, apology), 변증가(Apologist), 혹은 변증학(Apologetics)이라는 용어는 그리스어 아폴로기아(ἀπολογία)에서 유래하였는데(빌 1:16, 벧전 3:15), 변증가라고 불리는 일군의 교부들이 출현하기 전에 이미 바울이나 베드로가 이 용어를 사용하였다. 바울은 옥중에서 빌립보서를 기록하면서, 자신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해 세우심을 입었다”라고 했고, 베드로는 가혹한 시련 하에 있는 소아시아의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편지하면서, “너희 속에 있는 소망의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 ‘변증’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벧전 3:15)고 권면했다. 비록 한글개역성경에서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라고 번역하였으나 여기서 사용된 단어도 바울의 경우와 동일하게 ‘아폴로기아,’ 곧 ‘변증’이었다. 변증가들은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인들의 무죄함을 변증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독교 신앙을 소개하고 전도할 목적으로 기독교의 가치와 진리성, 고유성을 소개하고자 했다. 이들은 사도교부 시대와 그 이후 교회를 연결해 주는 역할을 감당했다는 점에서 ‘다리 놓는 사람들’로 불리기도 했다.
백석대·역사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