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흥민에게 ‘오른발’은 골키퍼에게는 ‘왼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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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흥민에게 ‘오른발’은 골키퍼에게는 ‘왼발’이다!”
  • 이의용 교수
  • 승인 2023.05.04 10: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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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의용의 감사행전(41)

가끔 음식점에서 “주일은 쉽니다”라는 표시를 보게 된다. 이걸 접할 때마다 “아, 이 집 주인은 그리스도인이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휴일에 문을 열면 장사가 더 잘 될 수 있는 업종인데 주일에 문을 닫는 건 정말 대단한 결단이라고 생각한다. 요즘에는 주말 장사 비중이 큰 상점이나 음식점들은 주말에 문을 열고 대신 평일에 쉬기도 한다. 그런 가게들은 모두 “O요일에는 쉽니다”라고 써붙인다. 그런데 왜 교인들이 운영하는 가게는 유독 “주일에는 쉽니다”라고 할까? ‘일요일’을 ‘주일’로 불러온 습관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또는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드러내기 위해서일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나에게 ‘주일’은 비신자 고객들에게는 ‘일요일’이다. 비신자들은 ‘주일’을 ‘週日’로 이해할 것이다. ‘주일’은 ‘나의 언어’이고, ‘일요일’은 ‘너의 언어’다. 

다른 사람과 소통을 하면서 ‘나의 언어’를 쓰는 건 상대방을 존중하지 않는 태도다. 그럴 때 상대방은 무시당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불편하기 때문이다. ‘너의 언어’를 쓰는 게 배려의 첫걸음이다. 우리나라 대통령이 미국 의회에서 영어로 연설하고, 만찬장에서 미국 노래를 불러 갈채를 받았다고 한다. ‘너의 언어’를 썼기 때문이다. 만일 미국 대통령이 우리나라 국회에서 한국어로 연설을 하고 만찬장에서 우리 노래를 우리 말로 불렀다 하자. 더 한 반응이 나왔을 것이다. 요즘엔 세계적인 합창단도 우리나라에서 공연을 할 때에는 우리 노래를 우리말로 부르는 게 보통이다. 얼마 전까지 ‘비정상회담’이라는 방송 프로그램이 있었다. 외국인들이 나와 우리말로 토크쇼를 하는 프로그램인데, 내용도 흥미로웠지만 그들이 우리말을 얼마나 유창하게 하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웠다. 

1961년 케네디 미국 대통령이 독일 서베를린을 방문했다. 당시 서베를린은 소련이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인지 시민의 80%나 모였다고 한다. 그는 불안에 떠는 서베를린 시민들에게, 미국을 포함한 자유국가가 그들을 포기하지 않을 것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의 연설은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로 시작하여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로 마무리했다. 그것도 독일어로! 이것이 바로 ‘너의 언어’다. 

여행 중 비행기에서 잠이 깊이 들 때가 있다. 그러다 깨보면 음료수와 도시락을 주는 시간이 지나고 만다. 그때마다 바로 눈앞에 안내문이 붙어 있다. 잘 쉬었느냐는 인사와 함께 음료수, 식사를 요청하면 주겠다는... 한글, 영어, 중국어, 일본어로 나눠 씌어 있어 편리하다. 이걸 가장 잘 하는 게 우리나라 항공사다. 그래서 해외 여행을 할 때 국적기를 이용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한국인이 많이 살고, 많이 방문하는 일본에는 한국어 안내가 잘 돼 있지만,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자기네 언어로 모든 걸 표시한다.

 

“‘나의 언어’를 ‘너의 언어’로 ‘통역’해주는 게 배려!”

나는 교통표지판을 비롯한 공공 시각물에 관심이 많다. 우리의 공공 시각물에는 불친절하고 불편한 것들이 많다. 그 중에서도 제일 불편한 게 ‘나의 언어’식 표현이다. 고속도로 톨 게이트에 붙어 있던 ‘표 파는 곳’은 ‘나의 언어’이고, ‘표 사는 곳’은 ‘너의 언어’다. ‘나의 언어’가 ‘너의 언어’로 바뀌어야 좋은 세상이 된다. ‘세금 징수’는 ‘세금 납부’로, ‘OO교회 오시는 길’은 ‘OO교회 가는 길’로, ‘버스 정류장’은 ‘버스 타는 곳’으로, ‘무엇을 드릴까요?’는 ‘무엇을 드시겠습니까?’로, 식당의 ‘배식대’는 ‘밥 받는 곳’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래서 ‘안전선 밖으로 한 걸음 물러나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멘트도 ‘안전선 안으로 한 걸음 물러나 주시기 바랍니다’로 바뀌었다.  

손흥민에게 ‘오른발’은 골키퍼에게는 ‘왼발’이다. 설교자에게 ‘왼쪽’은 회중에게는 ‘오른쪽’이다. 그래서 찬송가 가사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예수께로 나옵니다”가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예수께로 나갑니다”로 바뀌었을 것이다.   

비신자나 새신자가 기독교를 접할 때 무엇이 가장 불편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일까? 바로 ‘나의 언어’ 사용이 아닐까? ‘나의 언어’를 강요할 때, 상대방은 ‘배려가 부족하다’, ‘무례하다’. ‘불친절하다’고 느낀다. 상대방의 입장과 눈높이에 맞춰 ‘나의 언어’를 ‘너의 언어’로 ‘통역’해주는 게 배려다.

이의용 / 아름다운 동행 감사학교 교장, 전 국민대 교수
이의용 / 아름다운 동행 감사학교 교장, 전 국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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