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기획] 전하기만 한다고 전도는 끝나지 않는다
상태바
[연중기획] 전하기만 한다고 전도는 끝나지 않는다
  • 한현구 기자
  • 승인 2023.05.02 09: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전도의 패러다임을 Renewal 하라

순장이 되려면 전도를 해야만 했다. 기자가 대학 시절 몸담았던 CCC(한국대학생선교회)에서의 이야기다. 정확한 수치는 이제 흐릿하지만 어림잡아 10명 이상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의 전도는 CCC의 상징과도 같은 사영리(四靈理) 책자를 손에 들고서 캠퍼스 교정을 어슬렁거리다 이야기를 잘 들어줄 것 같은 선한 인상을 찾아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냐”며 말을 거는 것으로 시작했다.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 일이었지만 왠지 모를 두려움에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았던 그때의 긴장감이 선명하다.

한때는 열정적인 전도가 한국교회의 폭발적 성장을 견인했지만 이제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 최근 통계에 따르면 개신교인에게 전도를 받았을 때 부정적 느낌을 받았다는 응답이 70%를 훌쩍 넘는다. 그러다보니 이제는 도리어 기독교인 스스로가 전도를 망설이는 분위기다. 학원복음화협의회의 조사에서 ‘지난 1년간 한 번이라도 전도한 경험이 있다’는 기독 대학생의 비율은 2012년 42.4%에서 2022년 24.3%로 급감했다.

전도(傳道). 도를 널리 퍼뜨려 알림을 의미하는 단어다. 요즘은 기독교에서 하는 포교활동으로 의미가 굳어졌다. 이제 와서 굳이 전도라는 단어의 의미를 되짚는 이유는, 이 땅에서 다시 전도가 활발히 이뤄지기 위해선 ‘전도’라는 개념의 재인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다. 이제는 더 이상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복음을 전하는 것이 전도의 전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길거리 노방전도가 효과가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단지 복음을 입에서 귀로 직접 전하는 것만이 전도의 알파와 오메가는 아니라는 의미다.

전도를 그저 복음을 선포하기만 하면 그만이라고 여기는 인식에 변화가 필요하다. 사진은 사영리를 현대적 감각으로 재탄생 시킨 ‘THE FOUR’ 전도지.(사진:순출판사)
전도를 그저 복음을 선포하기만 하면 그만이라고 여기는 인식에 변화가 필요하다. 사진은 사영리를 현대적 감각으로 재탄생 시킨 ‘THE FOUR’ 전도지.(사진:순출판사)

 

선포에서 그친다면 미완성

영국 성공회 캔터베리대주교와 요크대주교의 전도 고문으로 활동했던 신학자 마이클 그린은 ‘전도’와 ‘전도 유사 행위’ 사이에 단호하게 선을 긋는다. 마이클 그린에 따르면 전도는 교회의 자리를 채우는 행위가 아니며 성도의 수평 이동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축제로 이뤄지는 간헐적인 행사도 아니고 간단히 기독교의 교리를 소개하며 구원을 강조하는 반복적인 시스템도 아니다. 단순히 개인적인 사역이 아니며 목회자만이 하는 것도 아니고 일부 신자만의 전유물도 아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눈길을 사로잡는 대목이 있다. 바로 ‘전도는 간단히 기독교의 교리를 소개하며 구원을 강조하는 반복적인 시스템이 아니’라는 것. 지금까지 우리 인식 속에 전도란 당연히도 기독교의 교리를 소개하고 구원을 강조하는 것이라 인식돼왔다. 앞서 언급했던 사영리를 읽어주는 모습은 우리가 생각했던 전도의 표본에 가까웠다. 그런데 전도가 그런 것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CESI 한국전도학연구소 김남식 소장은 이와 관련해 전도의 성서적 정의를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가 생각하는 전도는 단순히 선포의 범위를 넘어선 일종의 제자 양육에 가깝다.

김 소장은 “우리는 한 영혼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만드는 일에 부름 받았다. 그런데 전도를 단순히 선포와 동일시한다면 우리가 제자 만드는 일에 얼마나 근접할 수 있는지 질문하게 된다”면서 “만일 전도를 선포로만 생각한다면 우리는 쉽고 편리한 전도 방법을 선택할 수 있다. 이 관점으로 보면 단순히 노방 전도를 하고 여기서 결신과 교회 등록을 이끌어내면 전도가 완료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전도를 제자 양육이라고 생각한다면 회심에서 헌신, 그리고 믿음의 경주까지 전 과정을 함께할 책임을 가져야 한다. 전도자는 어떤 조작이나 미끼로 사람들을 교회로 데려오라는 부름을 받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케리그마적(선포) 전도에 몰두하는 분위기는 유독 한국교회에서 많이 관찰된다. 김남식 소장은 “설교 한 번, 선포 한 번으로 한 사람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만드는 전도가 끝나는 것이라면 예수님이 제자들과 3년 동안 함께하실 이유도 없다”며 “만일 교회가 전도를 제자 양육이라고 선언한다면 프로그램 위주의 단기적, 일시적, 동원적 방식에서 벗어나 좀 더 장기적인 전도 목회 철학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전도를 실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교회라는 공동체가 어떻게 비춰지는가

마이클 그린의 지적에서 한 가지 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대목이 있다. ‘전도는 개인적인 사역이 아니다’라는 명제다. 이는 말 그대로 전도가 성도 개인 차원에서 이뤄지는 사역이 아니라 한국교회라는 공동체 전체와 연결된 사역이라는 뜻이다. 이는 ‘전도가 단순히 개인 대 개인의 선포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앞선 명제와도 일맥상통한다.

<탈기독교 시대 전도>를 저술한 영향력 있는 목회자 팀 켈러는 초대교회의 모습에 주목한다. 팀 켈러는 레리 허타도의 <처음으로 기독교인이라 불렸던 사람들>을 언급하면서 “허타도는 로마 제국 당시 기독교는 가장 박해받는 종교였음에도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한다. 그가 강조한 것은 당시 기독교가 지닌 사회적 자세다. 기독교는 세상의 통념을 바꾸는 유일한 공동체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팀 켈러의 설명에 따르면 초대교회는 사회적 책임과 역할을 다하는 공동체였다. 초대교회는 여러 인종과 민족이 함께한 공동체였고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를 돌봤던 헌신적인 공동체였다. 예수님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처럼 초대교회 공동체는 글자 그대로 어려움에 처한 ‘모든’ 사람을 품었다.

또한 죽임을 당하는 와중에도 오히려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했던 예수님과 스데반의 모습을 닮아 되갚지 않고 용서하는 공동체였으며 낙태를 비롯한 유아 살해를 강력히 반대하고 생명의 존엄을 지켰다. 이는 그 자체로 충격적인 모습이었고 이교도인이 보기에도 매력적인 모습이었다. 박해하는 이들조차 매력을 느낄 정도이니 전도는 자연스레 이뤄질 수밖에 없었다. 전도가 개인적 차원의 사역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초대교회가 보여준 모습은 오늘날의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 가능하다. 여러 인종과 민족이 함께했던 것처럼 다민족교회를 세울 수 있고 가난한 자를 돌보고 정의를 추구할 수 있다. 동시에 공손한 자체로 소통하며 화평의 공동체로서의 본을 보인다면 더할 나위 없다. 생명의 가치가 점점 경시되는 사회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생명의 가치를 지키는 것도 교회가 달리 보일 수 있는 분야다.

최동규 교수(서울신대 실천신학) 역시 “포스트모던 문화가 점점 확대되는 환경 속에서 복음 전도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해야 한다”면서 “복음의 본질로서의 성육신적 섬김이 필요하다. 성육신은 인간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위대한 전략이었다. 이를 보면 우리 그리스도인이 불신자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지 분명하게 알 수 있다”고 제안했다.

다만 개인이 아닌 공동체 사역으로 전도를 이해한다는 것이 힘을 모은 교회가 영향력을 행사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최 교수는 “그동안 한국교회는 강한 이미지를 키워왔고 실제로도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만큼 강한 집단이 됐다. 그래서 그 영향력을 십분 활용해 전도가 수월해졌느냐 묻는다면 의문”이라며 “오히려 역사의 흐름 속에 복음은 기독교가 약할 때 빠르게 확산됐다. 성서와 기독교 역사에서 진정한 복음 전도는 겸손, 희생, 순종을 뜻하는 약함으로부터의 선교를 통해 이뤄졌다. 우리가 가진 힘을 이용해 복음을 전하려 한다면 예수와 정반대 입장에 서는 결과를 만들 것”이라고 지적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