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수의 영화 읽기]그리스도인 부모에게 말을 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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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수의 영화 읽기]그리스도인 부모에게 말을 걸다
  • 최성수 박사(문화선교연구원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3.31 11: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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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버나움(나딘 라바키, 드라마, 15세, 2018)

<가버나움>은 레바논 베이루트를 배경으로 난민들이 겪은 실제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 작품이다. 2019년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을, 아카데미에서 외국인 영화상을, 그리고 그 밖의 많은 영화제에서도 수상의 행진은 계속 이어졌다.

영화는 법정에서 시작하는데, 한 아이가 법정에 서게 된 배경을 설명하면서 자인이 짊어진 삶의 무게를 보여준다. 베이루트의 외곽 슬럼 지역에 가족과 함께 사는 작은 키에 체격이 왜소한 한 어린 남자아이 자인을 중심으로 영화는 전개된다. 몇 명인지조차 모르는 여동생들 가운데 사아르와 특히 친하다. 가족을 돌보는 일에서 자인은 무능력하고 무책임한 아버지를 대신한다. 자인은 난민 가족이라 출생 신고도 할 수 없다. 발각되면 쫓겨나기 때문이다.

게다가 학교에 가면 일하는 시간이 줄어든다는 이유로 아버지는 자인을 학교에도 보내려 하지 않는다. 자인은 동생들과 함께 돈을 벌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한다. 가짜 처방전으로 받은 마약성 진통제를 물에 녹여 주스로 만들어 거리로 나가 팔고, 그 일이 마치면 동네 가게에서 물건을 배달한다. 파김치가 되어 집에 오면 라면으로 대충 끼니를 해결하고는 잠자리에 든다.

반복되는 일상 가운데 자인은 아끼던 동생 사하르의 잠자리에서 생리혈을 발견한다. 자인은 이 사실을 부모에게 발각되지 않으려 애를 쓰는데, 왜냐하면 여자가 생리를 시작하면 임신할 수 있다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가난한 집안의 경우 돈 있는 집으로 팔려 가는 경우를 주변에서 종종 보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부모는 11살의 사하르를 집주인 사하드에게 보낸다. 이 사실에 분노한 자인은 집을 나가고 일자리를 얻으려 백방으로 노력하지만,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번번이 거절당한다.

그러다가 놀이공원에서 일하는 에티오피아 출신의 라힐을 만나는데, 그녀는 외국인 노동자로 일하다 뜻하지 않게 임신하게 되어 도망친 이후 가짜 체류 허가증으로 불안하게 살아가는 처지였다. 출산 후 젖도 떼지 않은 아이를 데리고 다니며 일하는 일이 쉽지 않았던 라힐은 자인을 그녀 집에 거주하면서 아이를 돌보게 한다.

자인으로 인해 라힐의 삶이 한결 편해졌지만, 가짜 체류증을 갱신해야 하는 시기가 가까워짐에 따라 라힐의 불안은 커져만 간다. 브로커가 요구하는 돈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돈을 구하려 노력하다 경찰에 붙잡힌다. 라힐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던 자인은 라힐을 찾아 나서는데, 결국 자기에게 스웨덴으로 보내주고 또 돈과 함께 아이를 좋은 집으로 보내주겠다는 말을 믿은 자인은 아이를 브로커에게 넘겨준다. 그리고 스웨덴으로 가기 위해 출생 증명서를 가지러 집에 돌아갔다가 사하르가 출산 중에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분노하여 사하드를 칼로 찌른다.

살인 미수로 경찰에 체포되어 감옥에 가게 된 자인은 엄마의 방문에서 임신 소식을 들으며 경악한다. 게다가 죽은 사하르를 대신해서 딸이면 좋겠다는 말을 듣고는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 그 후 자인은 한 텔레비전 프로에 전화로 참여하여 부모를 고소할 의사를 밝히는데, 여기까지가 자인이 왜 법정에 서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이야기다.

자인이 부모를 고소하게 된 이유는 아이를 낳기만 했지 제대로 양육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양육에 무책임한 부모를 고소한다는 것인데, 자인의 마지막 바람은 사하르의 비극이 반복하지 않기 위해 엄마가 더는 아이를 낳지 못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이야기의 얼개는 아이를 낳기만 했지 제대로 양육하지 않은 부모에 대해 불만을 품은 자녀가 자기 부모를 고소한다는 내용이다. 감독은 부모가 자식을 낳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양육의 책임이 있다는 것을 환기하였다. 또한 아동학대의 새로운 국면을 보여주었는데, 비록 폭력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아무런 양육도 하지 않고 그대로 방치하는 것도 아동학대의 하나임을 폭로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난민을 위한 정책 부재가 어떠한 비극으로 이어지는지 그 실상을 잘 보여주었다.

관점을 달리해서 이야기의 초점을 신앙 양육에 맞추어보자. 유아세례와 관련한 문답에서 부모는 자녀에 대한 신앙적인 양육을 책임질 것을 서약한다. 그런데 만일 자녀가 유아세례를 받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나게 했지만, 부모가 세상에서 성공하기만을 바랄 뿐 자녀의 신앙 성장을 염두에 두며 양육하지 않는다면 그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물론 영화 <가버나움>에 나오듯이 자녀가 이것에 불만을 품고 신앙의 성장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않은 부모를 고소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본성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기보다 자신의 욕망에 따라 살기를 더 원하기 때문이다. 신앙 양육 때문에 부모에 대한 불만족을 표할 자녀가 얼마나 될지 의심이다. 경험에 비추어 추측하기로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부모의 신앙적 양육의 부재로 자녀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지 못하고 세상 안에 머물러 있다든지 혹은 하나님의 은혜로 만족하지 못하고 세상이 주는 쾌락과 힘을 추구하는 삶을 살게 된다면, 도대체 이것에 대한 책임에서 부모는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나님 앞에서 부모는 어떤 평가를 받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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