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샘물] 흥얼흥얼 찬송하는 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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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샘물] 흥얼흥얼 찬송하는 은사
  • 이복규 장로
  • 승인 2023.03.31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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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복규 장로(서울산성감리교회, 서경대학교 명예교수)
이복규 장로(서울산성감리교회, 서경대학교 명예교수)

명색이 장로인 내가 열등감을 가진 게 하나 있었다. 방언을 비롯해서, 이른바 성령님의 신비한 은사를 체험하지 못한 데 대한 콤플렉스가 그것이었다. 오순절교회 계통의 영향을 받은 교인들 가운데, 방언을 자랑하거나 방언으로 기도할 때면 그랬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방언은 외국어로서의 방언이지, 오늘날의 방언과는 다르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랬다.

방언은 못하지만, 내게는 글쓰기 은사가 있지 않은가? 이렇게 달래기도 하지만, 신비한 은사라고는 할 수 없으니, 내심의 열등감은 여전하였다. 그러다 얼마 전, 내게도 신비한 은사가 하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흥얼흥얼 무시로 찬송하는 은사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하루종일 흥얼거린다. 걸어갈 때나 무슨 일을 할 때나 흥얼댄다. 대부분 복음송 아니면 찬송가다. 집에서 아내를 도와 설거지할 때도 찬송이 나온다. “당신, 힘들지 않은 척하려고 일부러 찬송하는 거죠?” 아내는 그렇게 놀리지만 아니다. 저절로 나온다.

혼자 있을 때만 흥얼거리는 게 아니다. 다른 사람과 함께 걸어가다가도 흥얼거리기 일쑤다. 은퇴하기 전, 교내에서 동료 교수와 함께 점심 먹으러 가던 어느 날이었다. 무심코 흥얼거렸던 모양인데, 동료 교수가 핀잔했다. “노래는 혼자 걸을 때나 하시지요.” 의도하지 않은 결례를 범한 셈이다. 더욱이 그분은 불교 신자였으니 퍽 거북했겠다.

언제부터 흥얼거렸을까? 아마도 2013년 지독한 우울병으로 일 년 넘게 고통 받다가 극적으로 치유 받은 후부터가 아니었나 싶다. 나날이 경험하는 삶의 기쁨과 감사를 지인들에게 아침톡(처음에는 아침문자)으로 전하면서 찬송도 함께 터져나오기 시작한 듯하다. 물이 고이면 저절로 흘러넘치게 마련이듯 아마 그러지 않았나 싶다. 다시 건강해져 보고 듣는 세상은 이전의 세상이 아니었다. 모든 게 하나님의 은혜요 감사 투성이었다. 그 감격을 아침톡으로 간증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나머지 감사의 물결이 입술을 타고 찬양으로 흘러나와 지금까지 이어지는 듯하다.

“다른 사람 있을 때는 제발 절제하세요.”

얼마 전 아내가 이렇게 충고했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알아요? 그냥 저절로 흘러나오는 걸 낸들 어떻게 해요?”

이렇게 변명하다가 퍼뜩 깨달았다. 방언만이 아니라, 내가 무시로 찬양을 흥얼거리는 것도 성령님의 특별한 은사라는 사실을!

도대체 어떤 찬양이 흘러나올까? 궁금해서 며칠 전에는 메모해 보았다.

“잠시 머물 이 세상은 헛된 것들뿐이니 주를 사랑하는 마음 금보다도 귀하다.”

“나는요 세상에 있을 맘 없어요. 이 세상 이 세상 나의 집은 아니요.”

“아버지 사랑합니다. 아버지 경배합니다. 아버지 채워 주소서 당신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이름 높여 드립니다. 주의 나라 찬양 속에 임하시는 능력의 주께 찬송하세.”

삼성 코엑스 전시장에서, 넥슨의 창업주 김정주 회장의 자살 사건을 화제로 어떤 회사 상무와 대화한 직후 흘러나온 찬양이 <잠시 머물 이 세상은 헛된 것들뿐이니>, <나는요 세상에 있을 맘 없어요> 이 두 찬양이었다. 이 세상의 부귀가 얼마나 헛된 것인지 절감한 충격을 이 찬양으로 고백하게 성령님께서 역사하신 것이리라. 이어서 <아버지 사랑합니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이 두 곡으로 내 시선을 온전히 하나님께만 향하도록 단속하신 것이리라.

유튜브에 보니, 늘 흥얼거리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란다. 이제 더 이상 방언의 은사를 부러워하지 않겠다. 찬송 흥얼거림의 은사를 모두가 누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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