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에서 목회자로… “어디로 부르시든 순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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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에서 목회자로… “어디로 부르시든 순종합니다”
  • 이인창 기자
  • 승인 2023.03.13 14: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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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사명선언문] 열린문교회 조성호 목사

섬 목회부터 병원, 선교사역 이후 도시 목회까지
‘하나님을 기쁘게, 이웃을 행복하게’ 사명 붙들고

유독 추운 겨울이었다. 성탄절 다음날 차도 사람도 다니기 어려울 정도로 기록적 한파였다. 어머니의 죽음 때문에 바람은 더 날카롭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원래 부모님은 교회를 다니지 않았어요. 워낙 유교 집안인데다 제사도 많았습니다. 어머니는 외할머니 영향으로 신앙생활을 했던 것 같은데, 시집와선 교회를 못 가셨어요. 그러다 치료방법이 없는 병을 얻게 되어 다시 예수를 믿으셨고, 일 년 후 돌아가셨습니다.” 

조성호 목사(열린문교회)는 고등학교 3학년, 어머니를 떠나보냈던 날이 지금도 생생하다. 당시엔 운구차가 없어 경찰관이던 아버지가 닷지 트럭을 경찰서에서 빌려왔다. 목사님과 교인들은 트럭 뒤에 몸을 싣고 칼바람을 맞으며 선산까지 따라가 운구하고 찬송을 불러주었다. 

장례를 마친 다음주, 새해 첫 주일부터 아버지와 5남매는 교회에 등록했다. 교회에서 듣게 된 두 이모의 특송은 천사의 소리였다. 하나님께서 주신 깊은 감동에 전율했다.

“어머니는 47세에 너무 일찍 돌아가셨지만 신앙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아버지는 교회를 오가셨지만 퇴직 후 칠순이 넘어서 예수님을 영접하셨어요. 100일 정도 새벽기도를 마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지요.”
 

조성호 목사와 최영미 사모는 하나님께서 부르신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 사명을 감당해왔다. 하나님을 기쁘게, 이웃을 행복하게 하는 열린문교회가 되도록 오늘도 달려가고 있다.
조성호 목사와 최영미 사모는 하나님께서 부르신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 사명을 감당해왔다. 하나님을 기쁘게, 이웃을 행복하게 하는 열린문교회가 되도록 오늘도 달려가고 있다.

감당할 수 없이 부어주신 은혜
조성호 목사가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세월이 한참이나 흐른 뒤이다. 그의 원래 직업은 교사였다. 아내를 만나 결혼을 하고는 목포 처가에서 살며 교편을 잡고 있었다. 그리고 교회에선 교사로 봉사했다. 

“목포에서 제법 규모가 있는 교회를 다녔는데, 제가 고등부 부감이 됐습니다. 고등부 학생만 100명 남짓 출석하고 있었는데, 살펴보니 재적 명단에 300명이 넘게 있는 거예요. 200명은 잃어버린 거잖습니까. 특히 중직자 자녀들이 많았어요. 왜 안 나오는가 봤더니 학교에서 하는 일요일 특별수업, 방과 후 수업 때문에 못 오는 거였습니다.”

1990년대엔 명문대학 진학에 목매며 일요일 등교를 강요하는 학교가 많았다. 그는 기도할 때마다 “아이들을 찾아가라”는 하나님의 강권하심을 느꼈다. 그 때부터 고등부 아이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기 시작했다. 아침이면 집집마다 다니며 제자들을 깨웠다. 야간 자율학습 휴식시간에 맞춰 학교 앞 분식집으로 찾아가 먹였다. 교회에는 잠시 들러서라도 먹을거리도 쟁여두었다. 길거리 농구가 한참일 땐 사역으로 도입해 학생들이 찾아오는 교회를 만들었다. 자연스럽게 부흥했고 이내 400명이 넘는 고등부가 됐다. 교회학교 전체의 성장으로 이어졌다.

재직 중인 학교에서는 교사들과 함께 ‘기독교사연합’이라는 신우회도 만들고, 각 학교마다 교내 깃대를 붙들고 기도하는 운동도 벌였다. 찾아오는 아이들과 교내에서 예배를 시작했다. 

“정말 많은 아이들이 복음을 듣고 영접했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은혜를 부어주셨고, 그 때부터 야간에는 신학공부도 하게 됐습니다. 아이들에게 성경을 더 잘 가르치고 싶었던 마음이 컸어요. 그래서 아내와 함께 신학교 학부과정부터 다녔습니다.”

국내외 주신 사명, 언제든 따르며
“어느 날 신학교 교학처장 교수님이 저를 부르더니 다음주일에 특별한 일 없냐고 물어요. 교회 봉사 외에는 없다고 했더니, 섬에 목자 없는 양들이 있다고 예배를 맡아달라는 겁니다. 신안군 한 섬인데, 한번 다녀간 후 다시는 오지 않는 교역자가 많아 교인들 상처가 컸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외양간 옆방에는 가마니만 깔려있었다. 학과 대표였기 때문에 간 봉사였지만, 다음 주 또 오겠다고 엉겁결에 말하고 말았다. 세 번째 갔을 땐 교인들이 기적이 일어났다며, 하나님이 보낸 분이 왔다며 십시일반 모은 5백만 원을 슬며시 내어놓았다. 교인들 눈가는 촉촉이 젖어있었다. 사실상 섬에서 개척하자마자 교회 건축을 해내고만 결과였다. 

건축 후에는 신학대학원에 진학했다. 배를 타고 목포로 나와 목포에서 다시 광주까지 오가야 했다. 교인들과 농사도 지었다. 하나님께서는 섬 목회 6년 후에는 육지 병원에서 원목으로 8년 동안 섬기도록 하셨다. 호스피스 사역과 요양 사역이었다. 사역에 몰두하다보니 신대원 진학 후 12년이 지나서야 목사안수를 받았다. 

죽어가는 환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하던 조 목사를 하나님은 이번에는 중국으로 보냈다. 중국인 유학생을 도왔던 인연으로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고, 그 때에는 사역에 몰두하고자 교직까지 내려놓았다. 

북중 접경지역에서 탈북 청소년들을 돌보는 사역까지 연계되었다. 공안에게 추적을 당하고 때론 붙들려 매를 맞은 적도 있다. 그런 경험 덕에 한국교육개발원 ‘HOPE’ 프로그램에도 참여해 탈북 청소년들의 정착을 위한 교재와 교육을 만들기도 했다. 돌아보면 모든 것이 은혜다.

중국에서 사역이 어렵게 되면서 조 목사는 새로운 선교지를 놓고 기도하며 일 년 동안 시니어를 위한 선교단체에서 훈련을 받았다. 네팔로 나가기로 하고 차근차근 준비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길을 막으셨다. 

“곧 출국해야 하는데 병명도 없이 염증수치가 높게 나와 병원에서 퇴원을 시켜주지 않는 겁니다. 그 때 서울에서 목회 제안을 받았던 거죠.”

예순을 넘기면서 조성호 목사는 농촌 목회지로 가고 싶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은 반대로 도회지였다. 지금 시무하는 열린문교회가 그곳이다. 

조성호 목사와 최영미 사모의 가족사진(장남 조융 선교사와 자부 송화숙 선교사, 손녀 조수아와 조아라(인도), 차남 조광현 공군대위와 자부 김현희)
조성호 목사와 최영미 사모의 가족사진(장남 조융 인도 선교사와 자부 송화숙 선교사, 손녀 조수아와 조아라, 차남 조광현 공군대위와 자부 김현희)

부흥케 하실 주님을 믿고 
서울에서 개척 목회를 하던 조성호 목사는 우연히 백석총회를 만났다. 원래 다른 교단 소속이었지만, 2호선 방배역을 우연히 왔다가 백석대학교를 봤고, 실천신학대학원 ATA 과정을 모집한다는 기독교연합신문 광고를 본 것이다. 훈련을 받고 싶었던 마음에 곧장 입학을 결심했다. 무엇보다 개혁주의생명신학, 그 중에서도 영적생명운동에 강하게 매료됐다. 

“개혁주의생명신학의 영적생명운동이 복음 사명의 본질이잖아요. 개혁주의생명신학은 그간 제 신학적 기반에서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해주었고, 특히 신학은 학문이 아니라 구체적인 복음의 능력이고 생명을 구원하는 능력이라는 것을 알고 경험하게 해주었습니다.”

조성호 목사는 안정적인 삶과 생활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간다. 섬에서 시작해 호스피스 사역, 중국 선교, 탈북민 사역, 그리고 개척목회 현장까지.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신앙 안에서 잘 자라준 두 아들이다. 특히 큰 아들은 아버지의 모범을 따라 신학을 공부하고 일찍부터 인도 선교사로 떠났다.

“물질적으로 아이들에게 준 것은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남긴 것만으로 감사하고 소중합니다. 저도 열심히 목회해야죠. 요한계시록 3장 8절 말씀을 붙들고 열린문교회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이웃을 행복하게 하려는 사명을 두고, 수년 내 부흥케 하실 주님을 믿고 나가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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