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수의 영화 읽기]편 가르기를 하지 않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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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수의 영화 읽기]편 가르기를 하지 않는 세상
  • 최성수 박사(영화 평론가, 캄보디아 선교사)
  • 승인 2023.03.07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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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타: 물의 길](제임스 카메론, 액션/어드벤처/SF/스릴러, 2022, 12세, 192분)
아바타 물의길 포스터 :네이버영화
<아바타:물의길> 포스터(네이버영화)

<아바타: 물의 길>은 그동안 인간 탐욕의 흔적으로 심각한 몸살을 앓고 있는 바다의 분노와 그리고 그가 탐색한 해저 세계의 신비를 영화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맘껏 펼쳐 보여준 영화다.

영화의 특징은 이야기가 단순하지 않은 것이다. 전형적인 가족 이야기일 뿐 서사가 부족하다고 평가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건 일부만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미 제목에서 암시하였지만, 이 영화에서 관객은 감독이 지구촌 소수자들을 염두에 두고 제작한 흔적을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난민, 인종 차별, 사회적 소수자와 약자, 가족을 잃은 자의 상실감, 약자들의 연대 등 다양하다. 사회적 약자들이 다수와 섞여 살면서 겪는 고민과 애환을 담았고, 그들과 함께 사는 삶의 모습도 담았다. 설리의 둘째 아들이 부족의 금기에 해당함을 알면서도 무리에서 배척되어 홀로 떠도는 톨쿤과 소통하려고 노력하는 장면은 매우 감동적이다. 마지막 전투 장면에서 보인 톨쿤의 활약을 생각한다면 사회적 약자들의 반란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지구에서와는 비교할 수 없지만, 배척과 포용의 문제가 판도라 행성에서도 작용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전편에 이어서 탐욕으로 빚어진 전쟁 문제와 무차별적인 생태계 파괴 등의 문제도 심도 있게 다뤄진다. 지구 생존을 빌미로 자연을 착취하여 그것을 통해 삶을 영위하려는 인간의 탐욕을 얼마나 공감적으로 잘 표현했는지 인간 자체가 싫어질 정도다. 최소한 이와 관련해서 공감을 얻는 데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또 감독이 단순히 영상기술의 진화를 위해서만 노력한 것이 아니라 인류의 지속적인 생존을 위한 문제와도 씨름하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야기는 판도라 행성에서 인간을 쫓아낸 후 15년이 지난 시점부터 시작한다. 판도라 행성 연구를 위해 남아 있는 인간들을 볼 수 있고, 아바타로 다시 태어난 제이크 설리에게는 가족이 생겼다. 2남 2녀다. 그동안 지구 환경은 더욱 악화하여진 터라 판도라 행성을 향한 인간의 욕망은 더욱 강렬해졌다. 생존을 위한 마지막 보루를 찾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생존을 위한 투쟁이 격렬해지자 종족의 보호를 위해 설리가 가족을 이끌고 숲을 떠나 이른 곳은 멧케이나 부족이 사는 곳이다. 이들은 산호초를 기반으로 한 부족 중 하나였다.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고 지내는 부족이다. 비록 낯선 부족이라도 환대하는 부족장의 호의로 설리 가족은 멧케이나 부족이 사는 구역에서 정착을 시작한다.

전편과 마찬가지로 지구 환경의 악화로 판도라 행성에 자원을 탐색하기 위해 온 인간은 탐욕과 복수심에 이끌려 전쟁을 불사하는데, 전편에서는 신비의 금속인 언옵테늄을 얻고자 숲을 파괴하였으나, 이번 영화에서 탐욕의 대상은 바닷속 동물 톨쿤이었다. 그들을 쫓는 모습은 포경선을 연상케 한다. 특히 그들이 겨냥하는 건 톨쿤의 뇌에서 추출한 암리타라는 물질이다. 지구에서는 안티에이징의 묘약으로 알려져 고가로 팔리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들을 결정적으로 무너지게 한 건 톨쿤의 공격이었다는 점에서 탐욕의 대상이 오히려 저주가 되는 사례다.

자원의 고갈은 물론이고 환경 오염 문제로 인한 생태계 파괴는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이에 생존을 위해 인간이 선택할 길은 우주탐사라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감독은 그것의 당위성과 필연성을 전제하고 영화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가 의문을 제기하는 건 인류 역사가 개척과정에서 보여왔던 침략과 도발의 길을 반복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가 하는 것이다. 이 질문을 통해 감독은 자원 전쟁, 영토 전쟁, 무역 전쟁, 돈의 전쟁 등 양상을 달리하며 진행된 인간의 이기적 욕망에 바탕을 둔 각종 전쟁 등이 새로운 터전에서도 반복할 위험은 얼마든지 있음을 경고한다. 인간이 조화와 균형 있는 삶을 추구하지 않는 한, 결국 우주 시대라는 것도 지구촌 종말의 시기를 지연하는 임기응변의 대책일 뿐 위기를 극복하는 근본적인 대책을 위한 혜안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말이다.

새로운 시대를 누가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답하면서 감독은 가족을 기대 지평 위에 올려놓는다. 달리 말해서 인류의 시작이 가족에서 시작했듯이, 새로운 행성 시대 역시 가족에서 시작할 수 있다는 것, 곧 서로 사랑하며, 서로 돕고, 서로 세우는 삶이 있는 가족에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영화를 통해 감독이 제시한 화두를 기독교적으로 생각해본다면 아마 모르긴 해도 다음의 질문으로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세상 가운데 현존하는 하나님 나라가 인간의 이기적 욕망의 대상으로 전락한 현실에서 그리스도인에게 기대할 수 있는 올바른 반응은 무엇일까?’

지구촌 생명의 지속을 위한 노력에서 관건은 지구에서든 다른 행성에서든 창조와 함께 현존하는 하나님 나라와의 관계를 바르게 갖는 일이다. 현존하는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탐욕으로 인해 거듭 침노하는 현실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이다. 대의적 명분으로는 인류의 성장과 번영 그리고 보존을 위한 자원을 얻기 위함이겠지만, 실상은 자기 욕망을 극대화하기 위함이기에 그렇다. 이익을 위해 편 가르기를 거침없이 행한 것이다. 이것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임을 우리는 영화를 통해 새삼 확인할 수 있다.

창조를 위임받은 우리는 위 질문에 적합한 대답을 줄 의무가 있다. 영화에서 말하는 조화와 균형을 달리 표현한다면, 편 가르기를 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다. 서로 소통하면서 서로를 받아주고, 서로 사랑하면서 공존의 길을 함께 모색하고, 서로를 세워주는 노력을 기울이면서 평화가 정착하기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대안이 아닐지 싶다. 감독은 이걸 가족에게서 보았으나, 우리는 이걸 교회 공동체에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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