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을 위한 위대한 외침, “대한독립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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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을 위한 위대한 외침, “대한독립 만세”
  • 정하라 기자
  • 승인 2023.03.02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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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세대] 3.1독립운동의 주역으로 나선 기독 청년들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우리 민족을 위해 애국애족의 정신을 바탕으로 항일독립운동의 선두에 나선 기독 청년들이 있다. 1918년 말부터 종교계를 중심으로 국내 민족지도자들은 세계정세의 변화에 관심을 갖고 학생단체와 연결해 거족적 독립운동을 준비했다. 그 결과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서를 발표했으며, 종교계와 학생 중심의 대대적인 만세운동이 전국에 걸쳐 일어났다. 104주년 삼일절을 맞아 국권 회복을 위해 민족자존의 기치를 드높였던 기독 청년들의 애국정신을 조명해보고자 한다.

일제에 의해 항일 독립운동가들이 투옥되었던 한국 최초의 감옥 ‘서대문형무소’가 있던 기념관 입구에 애국열사 유관순의 동상이 있다.
일제에 의해 항일 독립운동가들이 투옥되었던 한국 최초의 감옥 ‘서대문형무소’가 있던 기념관 입구에 애국열사 유관순의 동상이 있다.

열여덟의 꽃다운 나이로 순국한 유관순 열사

“삼천리강산이 어디인들 감옥이 아니겠습니까”
불과 열여덟의 앳된 소녀였던 유관순 열사(1902~1920)는 옥중에서 항소를 권유한 가족에게 이러한 말을 남겼다고 한다. 유관순 열사의 부친은 유중권 선생으로 그는 교회를 세워 교육운동을 전개한 계몽운동가이자 국권 회복을 위해 노력한 민족주의자였다. 자연스럽게 나라와 민족을 향한 애국심이 깊어진 유관순은 1915년 봄 이화학당에 입학해 선진학문을 수용하면서 민족의식과 신앙관이 더욱 뚜렷해졌다.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서거하자 이화학당 학생들은 자진해서 상복을 입고 휴교에 들어갔으며, 2월 28일에는 정기모임을 통해 전교생이 적극적으로 만세를 부르기로 결의했다. 일제 식민지배의 민족적 현실을 통탄해 하던 그는 3월 1일 파고다공원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으며, 휴교령이 내려지자 고향인 충남 천안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다.

1919년 4월 1일, 병천(아우내) 장터에서 유관순을 필두로 3천여 명의 군중들이 ‘대한독립’을 외치며,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이날 유관순의 부모를 포함해 19명이 시위 현장에서 순국했으며, 30여 명이 큰 부상을 당했다.

시위의 주동자로 체포된 유관순은 법정에서도 독립만세운동에 대한 당위성을 설파하며 자신의 신념과 애국정신을 지켰다. 그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이후에도 아침저녁으로 독립만세를 외치며 불굴의 독립 의지를 보여줬다. 그러나 모진 고문과 고초를 당한 그는 1920년 9월 28일 18세의 꽃다운 나이로 순국했다. 불과 10대 어린 나이였던 유관순의 결연한 태도와 애국애족의 정신은 지금까지도 많은 청년과 그리스도인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3.1학생 운동의 선봉장에 나선 청년, 김원벽

김원벽 선생(1894~1928)은 연희전문학교 학생 대표로 경성(서울)에서 일어난 3.1운동 학생시위의 선봉장이었던 인물이다. 그는 1894년 5월 20일 황해도 은율군 이도면에서 장로교 목사 김태석의 외아들로 태어났으며, 1912년 서울의 경신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1년 정도 숭실대학에서 수학한 그는 1915년 9월 조선기독교대학(연희전문학교)에 입학했으며, 학생의 신분으로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1919년 1월 말, 그는 YMCA에서 같이 활동했던 박희도의 주선으로 경성 시내 각 전문학교의 대표들을 만나 독립운동에 대한 논의를 벌인다. 그는 강기덕, 한위건과 함께 각 중등학교의 학생 대표자들을 뽑아 학생들을 결속시켰다.

마침내 3월 1일 정오가 되자 시내 각 전문학교와 중등학교 학생을 비롯한 수만의 군중이 탑골공원에 모였다. 민족대표를 기다리던 학생들은 탑골공원에서 독자적으로 독립선언서를 부르며 시위에 나섰다. 서울 전역에서 벌어진 만세시위는 경찰과 헌병의 탄압으로 해산됐지만, 그는 3월 5일 남대문역(현 서울역) 광장에서 인력거를 타고 시위를 이끌며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당시 그는 일제 경찰의 무자비한 폭력으로 쇄골이 부러진 상태로 체포되었으며,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1921년 11월 4일 만기 출옥했다. 출옥 직후 소감을 묻는 기자들에게 그는 “옥중에서 고초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요. 만기 돼 출옥하니까 그것도 당연한 일”이라고 말했다.

출옥 후에는 <신생활사>와 <시대일보사> 창간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언론을 창구로 활발한 활동을 하다가 1925년 <소년주보> 발행을 끝으로 언론활동을 마무리했다. 이후 고향인 황해도로 귀향했으며, 1928년 선운동우회(鮮運同友會)에서 상무이사로 활동하던 김원벽은 발진티푸스로 치료를 받던 중 35세를 일기로 짧은 생을 마쳤다, 

3.1운동의 불꽃을 점화시킨 ‘민족대표 33인’

3.1운동의 불꽃을 점화시킨 ‘민족대표 33인’ 중에서는 최연소 나이의 기독 청년이 있었다. 이갑성(1886~1981)은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최연소자로 독립운동에 함께 할 학생단 조직에 앞장섰다. 3.1운동 당시 각 학교의 시위운동을 주도하고 전단 살포의 중책을 맡아 활동하다가 복역했다. 2년 6개월의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6년에는 YMCA 이사를 맡아 청년을 지도, 육성했으며 신간회 사건으로 상하이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펼쳤다. 이후 귀국한 뒤 1938년 흥업구락부사건으로 다시 체포돼 7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 이갑성은 독립촉성국민회 회장을 지냈으며, 정치적 활동과 함께 광복회 등을 통해 독립유공자들의 복지를 위해 힘썼다.

3·1운동을 계기로 우리나라의 청년층은 민족해방운동의 주역으로 등장했다. 한국 강점 직후 일제는 우리 민족의 정치성을 띤 모든 사회단체를 강제로 해산시켰기에 당시 그나마 조직과 단체를 유지할 수 있었던 종교계와 청년 학생들이 독립만세운동의 주축을 이룰 수 있었던 것. 

당시 청년층이 독립운동의 선봉에 나설 수 있었던 이유로 역사교사 최태성은 “당대의 청년들은 고등교육을 받은 가장 지식인층에 해당했다. 청년들이 조선의 최고 엘리트였으므로 세계정세나, 우리 조선이 나가야 할 방향성에 대해 깊이 고민해 왔기 때문에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밝혔다. 

아울러 청년 주도의 독립운동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던지는 시사점을 짚었다. 그는 “역사 속에서 청춘의 존재는 역사의 거인이었고, 시대를 선도하는 계층이자 세력이었다. 그러나 요즘의 청춘과 청년들을 대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위로와 힐링을 주는 데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 같다”고 아쉬움을 전한 뒤 “역사 속에서 청춘은 능동적 존재로서 민족의 희망이 되었던 것을 기억하길 바란다. 청춘은 인생에서 정말 짧은 특권”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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