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기도에 신실하게 응답하신 하나님…복음은 제 인생의 전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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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기도에 신실하게 응답하신 하나님…복음은 제 인생의 전부입니다”
  • 김수연 기자
  • 승인 2023.01.31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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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홀리네이션스 선교회 대표 김상숙 권사
김상숙 권사는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의 사랑을 삶으로 보여줘야 한다며 23년째 외국인 노동자들을 물심양면으로 섬겨오고 있다.
김상숙 권사는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의 사랑을 삶으로 보여줘야 한다며 23년째 외국인 노동자들을 물심양면으로 섬겨오고 있다.

마마, 기도해요! 사장님 전화 와요.” 우리나라에서 애타게 일자리를 찾는 외국인 노동자들은 김상숙(76·삼위교회) 권사를 볼 때면 이같이 말한다. 한국의 조지 뮬러로 불리는 김 권사가 지닌 기도의 능력에 조금이나마 기대보고픈 마음 때문이다.

김 권사가 소외된 외국인들을 섬겨온 지도 올해로 38년째. 특별히 2000년부터는 국내에 홀리네이션스란 이름의 선교회를 설립해 타향에서 힘들어하는 외국인들과 동고동락하며 따뜻한 엄마의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지금껏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외국인들에게 무료로 숙식을 제공하고 장학 및 의료 선교를 펼쳐왔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의 부족함 없이 곳간을 채우신 사랑의 하나님 덕분에 날마다 기적을 체험한다고 고백하는 김 권사를 만나 그간 믿음의 여정을 들어봤다.

삶으로 전한 예수님 사랑
김 권사가 처음 외국인과 인연을 맺은 건 1985년 미국계 은행에서 근무하던 남편의 발령으로 홍콩에 새 둥지를 틀면서다. 그는 이곳에서 우연히 필리핀 가사도우미들의 처량한 현실을 알게 됐다. 매일 비가 내리는 우기였지만 빌딩 앞에 쪼그리고 앉아 밤이 돼도 떠나지 않고, 일주일에 하루 있는 휴일도 공원에서만 지내는 모습이 안쓰럽고 눈에 밟혔다.

그 날로 김 권사의 집은 필리핀 가사도우미들의 아늑한 피난처가 됐다. 자신의 집을 선뜻 오픈해 오갈 데 없는 이들을 먹이고 재우고 때로는 취업할 곳을 알선해 줄 만큼 정성을 들였다.

누구도 시키지 않은 일이었지만 하나님께 받은 마음 하나만으로 무려 8년을 이어간 그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나보다 더 큰 사랑을 줄 수 있는 예수님을 나누기 위해 노력했다고 겸손히 말했다.

1995년 남편을 따라 말레이시아로 터전을 옮긴 김 권사의 눈에는 자연스레 또 다른 외국인들이 보였다. 이번에는 건축 노동자로 일하는 인도네시아인들이었다. 장정한 남성들이 공사판에서 힘든 일을 하면서도 아침은 거르고 점심마저 시간에 쫓겨 대야에 밥을 비벼 먹는 현실을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일주일에 한 번 새벽에 장을 보고 일일이 도시락을 만들어 전하는 수고를 도맡았다. 곧 수십 명의 노동자들은 그를 마마 킴이라고 부르며 따르기 시작했다. 마음을 활짝 연 이들은 김 권사가 성경 암송을 시키면 너도나도 인도네시아 언어로 한 장씩 암송하며 생애 첫 복음의 말씀을 접했다.

성경에는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한13:18)고 나와있잖아요.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의 사랑을 삶으로 보여줘야 합니다. 행동이 없는 믿음은 낙제점이에요. 지극히 작은 자들의 외침과 신음소리도 그냥 지나치지 않으신 주님을 닮아 베풀어야 한다는 뜻이죠. 세상에 줄 게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말레이시아에서 김 권사의 전도 행진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는 주경야독으로 공부하고 현지인의 도움을 받은 끝에 성경공부 교재 세 권을 말레이시아어로 번역했다. 또한 도심에서 차로 몇 시간이나 달려야 하는 깊은 정글로 들어가 빈민 아이들을 열심히 섬겼다.

하지만 무슬림 나라에서 예수 그리스도 복음을 전하기란 결코 녹록지 않았다. 끝내 김 권사는 종교경찰에 붙잡혀 추방을 당했다. 그런데 그의 마음엔 왠지 3주 만에 돌아올 수 있을 것이란 강한 확신이 생겼다. 김 권사의 신실한 믿음에 하나님도 반응하셨다. 영어 이름의 스펠링을 바꾸는 편법을 쓴 것도 아니었지만 기적처럼 김 권사가 강제추방 명단에서 제외된 것.

이와 함께 주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셨다. 이 사건을 계기로 숨어서 신앙생활을 하던 말레이시아 청년들의 믿음은 일취월장하는 열매를 거뒀다. 아울러 김 권사 내외는 한국에서 직장을 얻는 새로운 복을 누리게 됐다.

우리는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문제가 실은 축복의 전주곡인 줄도 모르고 마귀가 좋아하는 원망과 불평 두려움의 언어로 기도하죠. 그렇지만 예상치 못한 일이 닥칠 때 혹은 고통이나 환란을 만날 때 하나님을 진정으로 신뢰한다면 충분히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기도이자 최고로 능력 있는 기도라고 생각해요.”

외국인 노동자들의 대모
10년 남짓한 해외 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으로 귀국해보니 많은 게 달라져 있었다. 특히 김 권사의 시선은 88올림픽을 기점으로 예전에 비해 유독 늘어난 외국인들에게로 향했다.

제 집이 일산인데 하루는 호수공원 인근 공장의 외국인 노동자들과 대화를 나눴어요. 사연을 들어보니 누군가는 3D현장에서 일하면서 치명적인 질병을 앓고 있고, 누군가는 공장에서 쫓겨나 공원 벤치에서 사흘을 굶고 있고, 또 누군가는 임금을 못 받아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자연스레 과연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고민하게 됐죠.”

2000년도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홀리네이션스 선교회는 이렇게 탄생했다. 외국인 노동자들을 섬기는데 두 팔을 걷어붙인 김 권사로 인해 선교회 사역의 스펙트럼은 무척 넓다.

우선, 일산에 위치한 3층짜리 쉼터를 통해선 갈 곳 없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무료로 숙식을 제공해주고 있다. 이들이 좋은 일자리를 얻도록 기도하고 알아보는 것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김 권사는 요즘은 취업비자가 생겨서 외국인 노동자들이 훨씬 수월하게 자립하지만 과거에는 그렇지 못했다. 쉼터에 한창 외국인들이 몰려들 때는 방부터 거실 끝까지 서로 머리를 맞대고 자야 할 정도로 붐볐다그래도 감사한 사실은 15명이 찾아오면 15명 모두 일자리가 연결된 것이었다.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으시다는 걸 느꼈다고 회상했다.

이들이 몸이 아프거나 다쳐도 걱정 없이 병원에 갈 수 있도록 입원비와 치료비를 지원해주는 것도 선교회의 일이다. 이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단비같은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얄팍한 주머니 형편으로 간단한 진료조차 제때 받지 못해 병을 키우는 이들도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덕분에 위급한 상황에서 갓난아기를 출산한 엄마부터 암 환자, 그리고 희귀병을 진단받은 소녀까지 수많은 이들이 소중한 생명을 건졌다. 수십만 원에서 수백, 수천만 원까지 이르는 비용을 지불하는 것은 고스란히 선교회의 몫이었다.

하나님이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기에 저 역시 한 영혼도 제 맘대로 포기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선교회에 환자를 보내주시면 감사를 드렸죠. 다른 종교를 가진 이에게 혹은 교회 문턱은 넘었지만 마당만 밟고 가는 사람에게 사랑의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니까요.”

눈여겨볼 대목은 선교회 슬로건이 모두에게, 조건 없이, 전액을 돕는다란 점이다. 그리고 놀라우신 하나님은 김 권사의 믿음의 선포대로 행하셨다. 지금까지 100억 넘는 재정을 단 한 번의 부족함 없이 모두 후원으로 채워주신 것. 그렇다고 빚을 진 것도 구걸을 한 것도 아니었다. 소위 깡통선교를 지양한다는 김 권사는 홈페이지에 그 흔한 후원계좌 하나 안 남겼다.

믿음은 내 형편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녀 수준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6:38)고 약속하셨어요. 다만, 이 약속을 누리려면 계산하지 말고 먼저 주는 것이 선행돼야 합니다. 주님을 깊이 신뢰하면 현실을 보지 않고 계산이 앞서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도 선교회에 돈이 부족해지기 전에 마중물 격으로 하나님께 자꾸 심었습니다.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두고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두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김 권사의 고백에도 혹자는 그래도 적지 않은 비용을 감당하면서 부담되지 않았는지물어온단다. 그럴 때마다 그는 오히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구경하는 즐거움이 더 크다고 지혜롭게 대답한다. 선교회를 행복동이라고 부르는 까닭도 이 때문이다.

내일 당장 얼마의 거금이 든대도 저는 두 다리 뻗고 자요. 주님의 일이기에 걱정하지 않습니다. 대신 우리는 겨자씨 만한 믿음으로 기도만 하면 돼요. 그러려면 먼저 말씀을 읽어야 하고요. 로마서 10장에도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쓰여있잖아요. 주위에서 제게 기도응답의 비결이 무엇이냐고 묻는데, 답은 바로 성경읽기에 있습니다. 제가 서른네 살부터 성경을 100독한 이유도 여기에 있죠.”

뿐만 아니라 김 권사는 선교회가 문을 연 이래로 이제까지 50명이 넘는 외국인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쥐어주며 학업의 길을 열어주었다. 그중 신학생들은 몽골·러시아·중국·네팔 등 자국으로 돌아가 사역자로서 복음 전파의 일익을 감당하고 있다.

김 권사는 선교회가 현재 여덟 개 국가에 교회와 미션스쿨 그리고 고아원을 세워 운영하고 있다홀리네이션스가 길러낸 신학생들이 그곳에 선교사로 역파송돼 예수님의 사랑을 돌려주는 모습을 보는 것이 가장 기쁘고 보람된다. 그리스도인은 궁극적으로 떡이 아닌 말씀으로 살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물론 지난 23년간 온갖 풍파를 다 겪으면서 마냥 은혜로운 순간만 있었던 건 아니었을 터. 더러는 김 권사의 헌신이 무색할 정도로 고마움을 모르거나 급한 불을 끈 뒤 태도가 적반하장 격으로 무례하게 바뀌는 외국인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끝까지 사명을 붙잡은 이유는 자신 또한 크게 다를 바 없는 부족한 존재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이 사역의 현장은 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거울이나 다름 없습니다. 도리어 저의 부족한 모습을 깨닫고 고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외국인들에게 제가 더 고마워해야죠. 저도 그들도 죄성을 가진 연약한 인간으로서 늘 주님이 필요한 건 똑같습니다.”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따뜻한 엄마가 돼주고 있는 김상숙 권사. 사진은 이들과 함께 야유회를 떠난 모습.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따뜻한 엄마가 돼주고 있는 김상숙 권사. 사진은 이들과 함께 야유회를 떠난 모습.

복음으로 품은 네 아들
한편, 김 권사에게는 복음으로 낳은 네 명의 아들이 있다. 디모데를 시작으로 요한, 바나바, 누가(가명)가 그 주인공들이다. 얼마 전 출소한 바나바를 제외한 세 명의 아들은 여전히 교도소에서 복무 중이다.

그가 첫째 아들 디모데를 만난 건 2011년 가을께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청주교도소에 있던 디모데는 우연히 버려진 신문에서 김 권사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감동을 받은 디모데가 무작정 편지를 보내온 게 지금까지 이어졌다.

하루는 편지에 저를 어머니라고 불러도 되겠냐고 썼더라고요. 얼굴도 모르는 사이가 무슨 어머니고 아들이겠어요. 그래서 단숨에 면회를 갔죠. 그 자리에서 얼굴 보고 디모데란 새 이름을 선물하고 아들 삼았습니다.”

요한이는 디모데를 통해 복음을 들은 친구다. 바나바, 누가는 각자 교도소에서 김 권사의 책을 읽고 편지를 보내온 청년들이다. 어쩌면 대수롭지 않을 인연, 그저 지나쳐버렸을지도 모를 부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권사는 일주일에 한 번 꼬박 손편지를 써서 아들들에게 부친다. 한 글자 한 글자에 영혼 구원에 대한 소망과 예수님의 사랑을 꾹꾹 눌러 담는다. 한 달에 한 번 먼 길을 마다치 않고 면회도 간다. 그러면 네 아들은 정작 가족도 나를 찾지 않는데 와줘서 고맙다며 눈시울을 붉힌다.

김 권사의 진심은 통했다. 디모데는 주님을 만난 후 하늘의 소망을 품고 변화된 삶을 살고 있다. 교도소에서 공부에 매진해 중고등학교 검정고시를 통과하고 국문학과 학사를 취득해 학사증을 선물로 보내온 순간을 그는 절대 잊지 못한다.

사람은 안 변한다고들 말하지만 그건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모르기 때문이에요. 저부터 예수님을 만나고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되었는데 이 행복을 이웃에게 전하지 않는다면 훗날 주님 앞에서 얼마나 부끄럽겠어요. 외국인 노동자들도 네 아들도 다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이기에 결코 내려놓을 수 없습니다. 복음은 제 인생의 전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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