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첫째 주일 하늘문을 여는 가정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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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첫째 주일 하늘문을 여는 가정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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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3.01.05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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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 뒤에 것은 잊어버리고 / 빌립보서 3:13~16 / 찬송: 384장

바울은 자신을 경주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현재의 삶에 만족하지 아니하고 현재 기록을 갱신하고자 하는 선수와 같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빌 3:12) 

바울은 아직도 스스로가 원하는 만큼의 수준에 이르지 못하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영적 부족을 깨닫고 좀 더 높은 영적 상태에로 나아가려는 강렬한 욕망은 영적 성장의 필수적 요소입니다. 영적으로 자족해 있는 그리스도인은 퇴보 일로를 걸을 수밖에 없습니다. 마귀는 이렇게 속삭입니다. ‘그 정도면 됐어’ ‘할 만큼 했어’ ‘너는 최선을 다 한 거야’ ‘이제 쉬어도 돼’ ‘너는 거기까지야’라고 속삭이며 나의 도전을 멈추게 합니다. 그것이 함정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며 눈멀고 벌거벗었음에도 ‘나는 부자요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고 합니다. 자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께 책망을 받는 것입니다.(계 3:16~18)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예수님과 관계를 위해 계속 전진했음에도 더 전진할 것을 고백했습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이 온전함을 이룰 수 있는 신앙의 자세입니다. 바울의 고백이 곧 우리의 고백이 되어 2023년을 영육간에 힘차게 달려가는 길에 주님이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의 기도

주님! 새해에 영육간 힘차게 달려가기를 원합니다. 

화요일 / 광야에서 들리는 하나님의 말씀 / 마태복음 3:1~4 / 찬송: 285장

하나님은 세례 요한을 쓰시고자,  사람으로 빚고자 광야로 내보셨습니다. 하나님은 광야훈련을 시키십니다.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격리되어 세상의 소리가 그친 고요한 심령 가운데로 찾아오셔서 자신과의 깊고 친밀한 교제를 허락하십니다.

광야는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빨리 그리고 크게 성공할 수 있는지 비결을 배우는 곳이 아닙니다. 광야훈련은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길들여져 육의 사람이 영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과정입니다. 광야훈련은 자신의 힘과 능력을 의지하던 사람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과정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세상과 단절된, 세상의 소리가 그친 광야에 철저히 홀로 남겨져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광야훈련에서는 세상의 소리, 사람의 소리, 원수 마귀의 소리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목자 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의 인도하심을 따라가야만 합니다. 그럴 때 참 기쁨과 안식을 누릴 수 있는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에서 먹고 마실 수 있습니다. 

성령의 세미한 음성을 통해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은 육신의 귀가 아니라 영적인 귀로만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혼잡한 세상의 소리와 혼미한 내면의 소리로부터 철저히 귀를 닫고 항상 광야의 영성으로 깨어서 기도하며 오직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 듣기에 온 신경을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기도
광야훈련을 잘 마쳐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붙들어 주시옵소서.
 

수요일 / 삶으로 예수님을 만나자 / 마태복음 2:1~11 / 찬송: 112장

새해에도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신 그 귀한 뜻을 깨달으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에 어리석은 모습과 지혜로운 모습 두 가지가 나타납니다. 헤롯왕과 제사장, 서기관은 어리석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먼저 헤롯은 메시아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헤롯은 그리스도의 탄생을 거부하고 제거하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 시대의 대표적인 종교인이자 신앙인들인 대제사장과 서기관은 어떨까요? 이들은 성경적 지식은 뛰어난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미가의 예언과 같이 베들레헴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나옴을 지식적으로 알고 있을 뿐 삶에 적용하지 않았습니다.
반면 지혜로운 동방의 박사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알고 있는 지식을 삶으로 적용하였습니다. 또한 그들은 알고 있는 지식을 예배로 승화하였습니다. 거리상으로 1,500km, 약 4개월이라는 멀고도 험한 거리를 지나 예배의 자리 가운데로 온 것입니다. 가장 소중한 예물을 드리는 예배로서 그들은 향유, 유황, 몰약을 준비한 것입니다. 성탄의 절기를 보낸 우리는 이제 삶으로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삶의 중심과 방향, 목표를 예수 그리스도로 향해야 합니다. 또한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새해에는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리는 예배자가 되길 바랍니다.

•오늘의 기도
우리 삶을 주님께 드리고 주님 앞에 합당한 모습으로 나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목요일 / 사랑의 예수 / 골로새서 2:10~15 / 찬송: 122장 

연말연시에 크리스천들이 해야 할 일은 바로 나눔입니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복되다고 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부문화로 정착하는 절기가 되어야 합니다(행 20:35). 

경제가 점점 어려워지면 소비가 줄어들 뿐 아니라 기부도 줄어듭니다. 교회는 이런 때일수록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돌보고 섬기고 베푸는 하나님 나라 문화를 세워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랑의 메시아로 오신 ‘크신 예수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작은 아기의 예수에서 크신 왕의 예수 신앙을 배우고 세워야 합니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의 사랑은 그 크기를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사람이 이 사랑을 받게 되면 삶의 활기를 되찾게 됩니다. 이 사랑의 가치를 발견한 사람은 힘든 일이 있어도 주님의 교회를 세울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그 사랑의 힘으로 인하여 침체된 삶, 가정, 직장, 사회, 세계가 새롭게 변화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사랑의 메시아로부터 힘을 얻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합니까? 그분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메시아 사랑의 또 하나의 특징은 견고성입니다. 무엇도 그 사랑을 흔들 수 없기에 우리는 믿고 섬기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복음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보내신 사랑의 구주입니다. 예수님처럼 크신 사랑을 나누는 새해가 되길 바랍니다.

•오늘의 기도
예수 사랑 전하는 나눔의 문화를 만들어 가길 원합니다.

금요일 / 말씀이 육신이 되셨습니다 / 요한복음 1:10~18 / 찬송: 85장

절대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시대에 하나님을 증명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의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가 ‘경험’입니다. 절대성은 무너졌지만, 자신이 경험한 것은 인정합니다. 

어거스틴의 제자가 스승에게 질문했습니다. “선생님, 하나님 나라가 정말 있습니까? 만약 천국의 실재를 안 믿고 산다면 어떻게 될까요?” 어거스틴은 “천국의 실재를 믿고 사는 삶과 불신하는 사람들은 큰 차이가 있다. 천국이 있다는 믿음으로 살다가 천국이 있으면 정말 감사한 일이다. 천국을 믿고 살았는데 설혹 천국이 없다 해도, 이 땅에서 지혜롭게 살았기 때문에 손해가 없다. 만약 천국이 없다고 믿고 살다가 정말 없다면, 그것도 별로 손해 볼 일은 아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천국이 없다고 믿고 살다가, 있으면 그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대답했습니다. 천국의 실재를 믿고 사는 것이 현명하다는 말씀입니다.

본문은 요한이 그 시대의 주류였던 로고스 사상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증거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이 시대에 중요한 ‘경험’을 통해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복음을 경험해야 합니다. 내가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고, 내가 경험한 예수님의 이야기를 통해서, 그들도 또한 나와 같이 경험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오늘의 기도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토요일 / 하나님께 소유된 백성 / 창세기 6:14 / 찬송: 250장

로마시대 유괴된 아이나 포로를 찾아오기 위해, 또는 노예를  해방을 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가를 지불해야만 했습니다. 대가로 쓰이는 ‘돈’ ‘소중한 물건’ ‘목숨’을 통칭해서 대속물이라고 명명합니다. 히브리어로는 ‘코페르’라고 합니다. ‘코페르’는 몸값, 속전, 속죄금, 대속물 등으로 표현하는 단어로 시작과 끝이 되시는 예수님을 선포함으로 자신의 것으로 소유한다는 상형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방주를 짓고 역청을 바르라고 하셨습니다. 히브리어의 역청은 예수님을 상징하는 속죄금, 몸값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보혈의 피를 흘려 택한 인류의 모든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인간은 예수님의 피가 없이는 아무도 죄 사함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보혈로 칠해져 있어야 합니다. 방주를 역청으로 칠했다는 것은 예수님의 피를 상징하고 있으며 역청을 바르지 않으면 물이 스며들어 방주가 가라앉게 됩니다.

따라서 교회가 예수님의 보혈로 덮이지 않고 성도가 예수님의 피로 칠해지지 않으면 세상에 빠져 버리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속량에 의해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되고 율법의 지배가 끝난 것임을 반드시 기억하고 오직 나의 죄를 위하여 속죄물이 되어 주신 예수님의 구속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믿음으로 승리하시는 복된 성도님이 되시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의 기도
십자가 보혈의 대속물로 구원하여 주신 은혜를 잊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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