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역사의 첫 걸음은 어디?… 면면히 흘러온 발자취를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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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역사의 첫 걸음은 어디?… 면면히 흘러온 발자취를 따라
  • 인천=이인창 기자 
  • 승인 2022.12.29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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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르포 // 제물포 기독교 유적 순례기

미지의 땅을 처음으로 밟을 때 선교사들의 가슴은 얼마나 두근댔을까. 순교를 각오하고 기도로 준비했던 조선이 눈앞에 있다. 부산에서 잠시 기착했지만, 제물포에서 제대로 마주한 조선 사람들의 말과 행동, 옷차림, 분위기마저 어색하다. 설렘과 두려움이 공존하는 시간이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 미국 북장로회 소속 언더우드 선교사와 북감리회에서 파송된 아펜젤러 선교사 부부는 제물포항에 당도했다. 지금의 인천항 제1부두 인근이다. 아마 선교사들은 제물포의 흙을 처음 밟으며 조용히 눈을 감고 기도부터 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순종의 걸음은 시작됐다. 

지난 26일 오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처음 도착한 제물포를 찾았다. 새해를 열며 선교사들의 발자취를 담고 싶었다. 그 길을 따라 직접 걸어봤다. 한파 탓인지 해는 중천인데 기온은 영하를 벗어나지 못했다. 바람은 날카로웠지만, 살갗에 닿는 햇살은 부드러웠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 부부가 처음 배에서 내린 곳으로 추청되는 곳에 세워진 기념탑 교회. 내부에는 구한말 사진에서 볼 수 있는 암석이 그대로 있다. 

“선교사님 도착지, 바로 이곳입니다”
언더우드 선교사와 아펜젤러 선교사 부부가 제물포에 도착했을 때, 갑신정변 여파로 조선 정세는 매우 불안했다. “안전을 보장하지 못한다”며 사흘 전 주한 대리공사 조지 포크가 서신을 보냈지만, 선교사들은 이미 출발한 뒤였다. 

이번 순례 출발 지점은 선교사들이 처음으로 배에서 내린 곳을 찾는 데서 시작했다. 기독교 유적 관련 서적들은 ‘한국기독교100주년 기념탑’(인천 중구 항동 1가 5-2)을 가리켰지만, 1986년 선교 100주년 맞아 세운 기념탑은 말 그대로 기념 탑이었다. 사진 자료를 보면 선교사들이 도착했을 당시 이곳은 바다였다. 훗날 매립된 땅이다. 기념탑은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부부 청동상을 두고, 성부·성자·성령을 상징하는 3개의 탑신이 감싸고 있다. 6면의 부조, 원형 석조계단도 구성되어 있다. 

선교사들이 실제로 첫발을 디딘 곳은 기념탑 근처가 유력했다. 기념탑 바로 길 건너에 ‘기념탑교회’가 눈에 띈다. 좁은 평형의 3층 건물이다. 이 교회는 박철호 목사가 2012년 부지를 매입해 세웠다. 

신대원을 졸업하고 역사학으로 인하대 박사과정을 수료한 박 목사는 교회 위치가 선교사들이 처음 도착한 장소라고 확신했다. 교회 내에는 구한말부터 최근까지 제물포항 관련 사진과 지도가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는 옛 사진들을 비교하며 기념탑교회가 선교사들의 처음 도착지라는 근거를 자세히 들려주었다. 

“선교사님들 도착 전에는 제물포항 접안시설이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교회 건물 자리는 당시 배를 댈 수 있는 잔교(棧橋)가 있었고, 간조시 승선장과 만조시 승선장이 만나는 곳이었습니다. 제물포항을 출입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 승선장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층 내부에 들어서면 큰 암석이 내부를 큼지막하게 채우고 있어 놀랐다. 암석은 당시 해망대(海望臺)라고 불리던 언덕의 하단부이다. 언덕 꼭대기는 현재 호텔이 세워져 있다. 

박 목사는 “역사적 가치가 있는 지점이기 때문에 매입했고, 지금은 감리교 유지재단에 편입되어 공교회 자산이 되었다”면서 “교회 앞 고가도로가 곧 철거되면서 이곳을 방문하는 순례객들이 바다를 직접 조망할 수 있게 된 것이 은혜다. 10년 기도의 응답”이라고 들려주었다. 

인천자유공원에서 인천항 부두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인천자유공원은 우리나라 첫 근대식 공원이다.
인천자유공원에서 인천항 부두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인천자유공원은 우리나라 첫 근대식 공원이다.

첫 숙소 대불호텔부터 자유공원까지
기념탑교회를 나와 지하철 1호선 인천역 앞 차이나타운 입구로 향했다. 지난달 옛 대불호텔에서 있었던 개항장 커피 시음회 때 걸어봤던 경로를 따라 올라갔다. 

대불호텔(중구 신포로 23번길 101)은 아펜젤러 선교사가 항구에서 올라와 처음으로 묵었던 장소다. 1884년 미군 군함 요리사 출신의 일본인 사업가 ‘호리 리키타로’(掘力太郎)가 개업한 국내 첫 근대식 호텔로 유명하다. 

한국레저경영연구소 최석호 소장은 아펜젤러 선교사가 서양 요리를 대접받았다는 기록을 근거로, 대불호텔이 국내 첫 서비스 커피를 제공한 곳이라는 사실을 발굴하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서울 정동 손탁호텔보다 17년이나 앞선 역사다. 

최석호 소장은 “1889년 언더우드 선교사가 호튼 여사와 결혼하면서 신혼여행을 갈 때 커피를 선물로 가지고 가서 지방 관리들에게 전달한 기록이 있다. 선교사들은 복음뿐 아니라 새로운 문화를 전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의미를 평가했다. 

현재 빨간벽돌 건물은 인천시가 대불호텔 원형을 복원한 것으로, 바로 옆 목조 건물은 중구생활사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다시 대불호텔에서 발걸음을 옮긴 곳은 인천자유공원이다. 가파르지만, 청·일 조계지 경계 계단을 이용했다. 자유공원을 향하던 중 조미통상수호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 체결지라는 표지석(2006년)이 눈에 띈다. 

먼저 만난 박철호 목사가 아펜젤러 선교사가 남겨놓은 기록을 근거로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지는 기존 ‘화도진’이 아니라 표지석이 있는 곳이라는 새로운 주장을 내놓으면서 만들어졌다. 자유공원 정상에는 1982년 만들어진 규모가 큰 조약체결 100주년 기념탑도 만날 수 있다. 

조미수호통상조약은 우리나라가 서양국가와 맺은 첫 조약이다. 이 조약의 영향으로 선교사들의 자유로운 입국이 가능하게 됐고, 조선 정부도 미국에 보빙사 일행을 파견하기도 했다. 이 흐름 가운데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도 조선 땅을 밟을 수 있었다. 한 해 앞서 최초 의료선교사 알렌 선교사가 외교관으로 입국할 수 있었던 배경이기도 하다. 

서구 열강이 개항을 강요했던 역사로 보기도 하지만, 우리나라 근대화를 앞당기고 복음화를 위해 하나님께서 세우신 큰 계획임을 마주하게 된다. 자유공원은 인천항과 월미도 앞바다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명소다. 햇살 사이로 선교사들의 배 경로를 눈으로 가늠해본다. 선교사들은 모르는 걸음이였을 테지만, 하나님께서 세밀하게 인도하셨음을 느낄 수 있다.

국내 첫 감리교회로 세워진 내리교회의 머릿돌
국내 첫 감리교회로 세워진 내리교회의 머릿돌

선교역사는 면면히 흐른다
조금 걸어야 했지만 내리교회를 향해 방향을 틀었다. 골목을 따라 내려가다 보니 어느 읍내 같은 분위기의 길이 이어진다. 신포 로데오거리다. 오래된 건물이지만, 간판마다 유명 브랜드가 가득 넘친다. 로데오거리를 벗어나자 이내 내리교회가 모습을 드러낸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는 대불호텔에서 첫날 밤을 보냈지만, 이튿날 언더우드는 외국인 쿠퍼의 도움을 받아 곧장 서울로 향했다. 하지만 아펜젤러 부부는 제물포에 머무르는 선택을 했다. 그러다 불안한 한국 정세 때문에 일본으로 되돌아가는 좌절을 맛보았다. 부부가 다시 제물포로 돌아왔을 때는 6월 20일, 스크랜튼 선교사 일행과 함께였다. 그리고 나서 내리교회가 설립됐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일본으로 돌아갈 땐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선교지로 돌아왔고 인천 선교의 물꼬가 터질 수 있었다. 

내리교회는 사전 예약을 하면 역사전시관을 둘러보고 해설도 들을 수 있다. 숭고한 선교사들의 역사와 숨결이 교회 곳곳에 남아 있다. 1984년 지어진 예배당 건물에는 1901년, 1955년, 1964년 머릿돌이 함께 박혀있다. 그렇게 선교역사는 기억되고 면면히 흘러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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