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셋째주 하늘문을 여는 가정예배
상태바
12월 셋째주 하늘문을 여는 가정예배
  • 운영자
  • 승인 2022.12.14 10:5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월요일 / 성탄의 기쁨 / 누가복음 2:1~14 / 찬송: 121장

여러분은 이 성탄절을 어떻게 맞이하고 있습니까?

성탄절의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날입니다. 동방박사들, 목자들 모두가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경배하였고 기뻐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왜 우리는 기뻐하여야 하는가’입니다. 임마누엘의 은혜입니다. 이 은혜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실 수 없는 분이 우리와 함께 하여 주심에 감사하며 기뻐하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죄 많은 우리가운데 오신다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는 지극히 낮아지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약속을 성취하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이며 감사하며 기뻐할 일입니까!

더욱이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내가 죄로 인하여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지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즉 십자가의 대속하심입니다. 그래서 나를 새로운 피조물로 하나님의 자녀되게 하시고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고 사람과 화평을 이루게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은혜와 사랑 그리고 구원하심의 은총을 생각하며 성탄절을 맞이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기도
주님! 나로 하여금 낮은 자리를 향에 손을 내밀며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게 하시사 주님의 뜻을 따르게 하옵소서!

 

화요일 / 다른 씨 / 창세기 4:25~26 / 찬송: 436장

성경은 셋을 “다른 씨”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왜 다른 씨입니까? 
가인의 계보에 속한 사람들은 천지만물의 절대주관자이신 하나님을 자기 삶의 참 주인으로 인정하지도, 의지하지도 않고 오히려 자신을 스스로 삶의 주인으로 여겼습니다. 
반면 셋과 그의 후손은 오로지 창조주 하나님을 자기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하나님 그분을 경외하며, 주인이신 하나님을 예배하며 찬양하며 살아가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셋은 가인과 다른 씨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주신 구원의 하나님을 믿지 못하여 세상 사람들과 같이 우리 스스로의 힘과 능력으로 살아보려고 물질과 권력 그리고 명예의 성을 높이 쌓고 또한 그것을 믿고 의지하면 되겠습니까?
우리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거룩하고 구별된 씨앗인 셋의 자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인의 자손들인 세상 사람들과 동일한 가치관과 방식대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철저히 하나님을 우리의 힘과 방패(시 28:7)로 삼아야합니다. 철저히 하나님을 우리의 산성이시요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으로(시 46:1) 삼아야합니다.
우리는 어떠한 환경과 처지 가운데에서도 철저히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의 기도
사랑의 주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언제나 신뢰하며 경외하는 거룩하고 구별된 씨의 삶을 살게 하옵소서.

 

수요일 / 기적 중의 기적 / 사도행전 19:19~26 / 찬송: 191장

오늘 본문 가운데 몇 가지 기적이 나타납니다. 첫 번째 기적은 귀신의 능력으로 점치는 여인을 고친 사건이고, 두 번째 기적은 큰 지진이 일어나 옥문이 열리고 수갑과 차꼬가 풀리는 초자연적 현상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적에 대해 영적 체험 또는 초자연적 현상만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이 기적의 전부일까요? 보혜사 성령이 우리 삶 가운데 임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하나님의 자녀에게 임하는 기적 중에 기적은 무엇일까요?

먼저 고난 속에서도, 환란과 시험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옥중에 있는 가운데도 그들은 찬양하였고,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보혜사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하나님의 나라 속에 속하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기적은 고난, 환란, 시험 등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진짜 기적은 고난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견디는 것이며 이겨내는 것임을 기억합시다.

또한 끝까지 직분과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선교여행 가운데 큰 위기 상황에 직면합니다. 위기 상황에서도 그들은 복음을 전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결국, 기적 중의 기적의 결과는 간수와 온 가족이 하나님을 믿으며 큰 기쁨 안에 살게 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의 기도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주님의 복음과 사랑을 힘써 전하는 직분과 사명을 능히 감당하는 기적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목요일 / 평화의 예수 / 갈라디아서 6:12~18
찬송: 122장

아기 예수의 탄생을 왕의 탄생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왕의 평화를 선포하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의 혼돈과 방황과 절망과 다툼을 진정으로 평정하신 왕이 오셨다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아기 예수를 메시아 신앙으로 고백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리아가 천사로부터 분명하게 들은 바를 마리아는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 1:38)라고 고백한 후에,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다’(눅 1:50)고 찬양했습니다. 이것이 대림절 동안에 우리가 크게 불러야 할 찬양의 내용입니다.

이 대림절의 신앙고백이 그대로 이어진 것이 사도행전 교회입니다. 스데반 집사는 순교의 현장에서 성령 충만하여 메시아 신앙을 고백합니다. 사도행전 7:55~56절입니다. “55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이 메시아 신앙고백으로 마지막으로 그는 순교합니다(57~58절). 스데반 집사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부활하신 예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러니 죽어도 고백해야만 하는 위대한 신앙이 메시아 신앙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마음에 계신 예수님은 아기 예수님으로만 남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 신앙이 메시아 신앙으로 가야 합니다. 크신 예수, 높으신 예수, 위대하신 예수가 믿어져야 합니다.

•오늘의 기도
평화의 예수를 증거하게 하옵소서.

 

금요일 /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 데살로니가전서 5:6~11 / 찬송: 421장

의로운 사람들은 오히려 많은 고난을 당합니다. 이러한 세상의 모습에 대해서 우리는 많은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이런 세대를 보면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피곤하게 생각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악을 선으로 이기라, 이 세상을 사랑하라, 더 나아가서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선교적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영향을 줄만한 어떤 힘도 없는 우리의 모습을 보면 도대체 어떻게 사명을 감당하라고 하신 것이지 쉽게 이해가 되지 않고 안타깝기만 합니다.

이런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서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노아시대의 인간들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것을 후회하실 정도로 타락했습니다. 하나님은 결국 노아의 가족을 제외한 모든 악한 인간들을 홍수로 심판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홍수심판 이후에도 계속해서 나타나는 인간의 악에 대한 해결책으로 새로운 방법을 계획하셨습니다. 그것은 악에 대한 즉각적인 처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을 선택하여 그들을 통해서 악과의 전쟁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갈대아 우르의 아브라함을 선택하셔서 믿음의 조상으로 출발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세상의 악에 대한 모든 심판을 그리스도의 백보좌 심판으로 보류해 놓으셨습니다. 그것은 종말이 되기 전에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오늘의 기도
오늘도 깨어서 정신을 차리고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옵소서.

 

토요일 / 십자가 방주에 들어가자 / 창세기 6:14 / 찬송: 268장

구약 바로 왕 시대에 남아들이 태어나면 모두 죽이라는 무서운 명령이 내려졌을 때, 부모는 아이를 살리기 위해 갈대상자에 넣고 강에 띄웠습니다. 이집트의 공주는 목욕을 하러 갔다가 그 갈대 상자를 발견하였고 그녀를 통하여 모세가 살아났습니다.

방주, 상자는 히브리어로 ‘테바’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것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 안에서 함께 호흡을 하며 기도하고 예배를 드린다는 상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노아는 방주를 짓고 홍수 심판이 일어날 때에 방주 안으로 들어감으로 생명을 보전하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노아의 방주는 노를 젓거나 돛을 달아 어디로든 사람에 의하여 향해하는 것이 아니라 물에 둥둥 떠 있는 나무 상자였을 뿐이었습니다. 그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방주는 홍수 심판의 물 위에서 구원하시는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마지막 날에 심판이 있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십자가 예수님 안으로 들어오는 길 외에는 답이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영적으로 호흡하고 예배를 드리는 신앙의 삶이 심판을 면할 수 있는 길입니다.

하나님 섭리의 구원사역에 동참하는 성도가 되시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의 기도
주여 내가 신앙생활에서 오직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대속 안에서 영적으로 호흡하고 범사에 기도와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