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밝히는 말씀의 빛, 조선을 비추고 세계로 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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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밝히는 말씀의 빛, 조선을 비추고 세계로 향하다
  • 손동준
  • 승인 2022.12.07 2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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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서주일 특집 // 성경이 우리에게 오기까지

매년 12월 둘째 주일은 ‘성서주일’
전쟁의 참화 속에 성경이 위로 전해
성서주일은 한국교회가 오랜 기간 지켜온 아름다운 전통이다.
성서주일은 한국교회가 오랜 기간 지켜온 아름다운 전통이다.

“성서공회주일에 모여 성경 번역하는 사람과 성서공회에서 일을 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또 남녀 매서인(혹은 권서인, ‘쪽복음’ 등 성경을 팔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던 사람)과 무지한 사람 가운데 서책(성경)을 파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복음을 듣고 배우고자 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자”

1920년 발행된 ‘신학월보’ 5월호에 실린 ‘셩셔공회쥬일’이라는 글에 실린 내용이다. 아직도 ‘성서주일’이라고 하면 낯설게 느껴지는 교인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성서주일을 지킨 지 100년도 훌쩍 넘었다. 성서주일은 1899년 5월 7일 처음 시작된 ‘성서공회 주일’에서 유래했다. 1900년에 ‘성서주일’로 명칭을 변경했고 12월 둘째 주일로 굳어졌다. 지난 100여 년간 한국교회 성도들은 성서주일을 통해 성경의 가치와 필요 및 성경의 권위를 다시 생각하며 성서 보급을 위한 헌금에 동참해 왔다.

성서주일이 처음 시작된 1899년만 해도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온 지 얼마 안됐기에 교회의 자립도 매우 미약한 수준이었다. 이런 가운데 당시 조선의 성서사업을 이끌던 영국성서공회 조선지부 책임자 캔뮤어가 성서주일의 제정을 제안했다. 성서주일을 통해 서구 기독교의 아름다운 전통, 즉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것에 대한 감사와 감격으로 이웃에게 성서를 보급하고자 하는 마음을 한국 성도들에게 심어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올해 성서주일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오늘날이야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쉽게 성경을 볼 수 있으니 성서주일을 제정하던 당시의 기쁨과 소중함이 피부에 와닿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성서가 우리의 삶을 얼마나 바꿔 놓았는지,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미처 깨닫기 어렵다. 

성서주일을 앞두고 성서가 우리에게 오기까지의 여정을 돌아보고,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서 일어난 놀라운 변화들을 살펴봤다.

 

운하 건설에 버금가는 성경 번역

복음이 배척받던 우리나라에서 한글 성경이 번역·보급되기란 쉽지 않았다. 하나님은 서양 선교사들과 권서인 등 다양한 이들을 사용하셨다. 그들의 노력 끝에 우리 땅에서도 마음껏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됐다. 

처음부터 온전한 성경 66권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먼저 낱권들이 우리말로 번역되어 나오기 시작했다. 1882년 로스 목사가 펴낸 첫 한글 복음서를 시작으로 매킨타이어, 이응찬, 백홍준, 서상륜, 이성하 등이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각각 개별 낱권으로 번역해서 출판했다. 새로운 언어로 성경을 처음 번역하는 일은 쉽지 않다.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언어권에서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이 스스로 성경을 공부해서 번역하는 일은 일어날 수 없다. 누군가 찾아가서 그들의 언어를 배우면서 복음을 전하고, 그들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해야 한다. 

한국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데 참여했던 게일 목사는 최초의 한국어 신약전서의 번역을 마치고는 이렇게 말했다. 

“이 일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는 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뉴욕의 60층짜리 생명보험 건물을 짓는 일도 이만큼 힘들지 않습니다. 자그마치 10년이 걸렸습니다. 건물을 지으려면 기초를 놓기 위해 땅을 파야 하듯, 문장들을 골라내고 단어들의 의미를 파헤치며 엄습해오는 말라리아와 피곤과 싸우면서 선택하고 재어보고 판단하고 기록하는 모든 과정을 생각해 볼 때 이것은 파나마운하를 파는 것과 맞먹는 일로 여겨집니다.”

이런 방식으로 1900년 ‘신약젼셔’가, 1911년에 ‘구약젼셔’가 출판됐다. 이른바 ‘개역’이라고 부르는 신구약 통합 성경이 나온 건 1938년이었다. 이후 1988년에 개정되어 나온 개역은 개정의 범위가 넓었으므로 이름을 바꿔 ‘개역개정판’이라고 명명했다. 현재 한국교회가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개역개정판의 4번째 버전이다. 

 

말씀, 능력이 되다

성경 번역의 가장 큰 의의는 이 땅에 복음이 전파됐다는 것이다. 그런데 더 나아가 우리 선조들은 서구교회의 도움으로 번역·보급된 한글 성경을 통해 어두운 현실을 밝게 비추는 빛이 됐다. 복음을 받아들인 믿음의 선조들은 한국 전통 사회의 구습을 타파하고 개혁하는 데 앞장섰으며, 일제강점기의 민족적 어려움을 겪을 때도 한글 성경을 지키는 한편 독립운동에도 힘썼다.

또한, 성경은 그 자체로 우리나라의 어두운 시절마다 큰 능력을 나타냈다. 한국전쟁의 비참함 속에서 쪽 복음은 어린이들의 국어 교과서가 되어 미래를 위한 꿈을 꾸게 했고, 전쟁 포로들에게 전해져 복음을 전했다. 특별히 한국전쟁을 통해 삶의 고난과 영혼의 갈급함을 체험한 사람들이 더욱 성서를 찾았고, 피난민촌과 보육원, 국군 병원 등 다양한 곳에 성경이 반포되어 복음이 폭발적으로 전파될 수 있었다. 성경을 통해 복음을 받아들인 믿음의 선조들과 한글 성경은 한국 사회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했다.

성서주일은 한국교회가 오랜 기간 지켜온 아름다운 전통이다.
카메룬과 나이지리아 국경지역에 거주하는 캅시키 부족 사람들이 자신들의 언어로 번역된 성경을 받아들고 기뻐하고 있다. 

지금도 전 세계 곳곳에는 전쟁으로 고통 중에 있는 우크라이나를 비롯하여 종교적인 핍박과 가난에 처해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에게 전해진 성경은 복음의 평화, 소망, 용기를 불어넣고 있다.

우크라이나 마리우폴에 살던 안드리(Andriy) 가족은 전쟁의 한 가운데서 그 실상을 경험했다. 마을은 반복되는 포격으로 쑥대밭이 되었고, 지하실에 숨어 지내는 것에 위협을 느낀 가족은 대피소를 찾아다녀야 했다. 그 가운데 피난 버스를 타고 주변 국가로 몸을 옮길 수 있었고, 지역교회가 제공한 쉼터에 온 가족이 피난한 상황이다. 절망적인 상황이지만 안드리는 오히려 쉼터에서 받은 성경을 읽으며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교회에서 제공하는 쉼터에 도착했을 때 저희는 성경을 받았어요. 그리고 처음부터 성경을 읽기 시작했죠. 아브라함 이야기는 제게 큰 감동이었어요. 하나님께서는 모든 상황에 개입하셔서 아브라함을 지키신 것과 마찬가지로 저희를 도우셨고 목숨을 건지게 하셨습니다.”

대한성서공회는 “우리나라와 사회가 절망적인 순간을 만났을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위로를 전하고 다시 일어설 용기를 주었다”며 “이렇게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고난 중에도 넘치는 감사를 표현하며,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다했다. 지금도 성경은 여전히 코로나를 비롯한 전쟁과 자연재해, 빈곤 가운데 있는 지구촌 이웃들에게 회복과 소망을 주고 있다”고 전했다. 공회는 또 “성경을 보급하는 이 사역은 앞으로도 지구촌 곳곳에 새로운 복음 사역을 여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기도와 후원을 당부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기독교의 경전을 ‘성경(聖經)’이라고 부를 것인지, ‘성서(聖書)’라고 부를 것인지, 가끔 논란이 된다. 거룩할 ‘성(聖)’ 자에 경서(經書) ‘경(經)’ 자를 쓰면 우리의 경전을 높여 부르는 이름인 것 같고, 거룩할 ‘성(聖)’ 자에 책 ‘서(書)’ 자를 쓰면 그 경전을 조금은 폄(貶)하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아서 굳이 성서라고 하지 말고 성경이라고 하자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약전서와 구약전서를 거룩한 경전이라고 하든 거룩한 책이라고 하든 크게 의미 구분이 되는 것이 아니다.기독교의 경전을 다만 중국 전통에서는 성경이라고 불러오고 있고, 일본 전통에서는 성서라고 부르고 있다. 우리는 이 두 전통을 융합하고 있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본래는 성경이든 성서이든 그것은 일반 종교의 경전을 두루 일컫는 보통명사다. 기독교가 우리나라에서 우세한 종교가 되면서 그 용어를 사유(私有)하게 된 것이다.중요한 것은 기독교의 경전의 이름은, ‘성경’도 ‘성서’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기독교의 경전의 고유한 이름은 ‘언약서/계약서’다. 구체적으로는 ‘구약’과 ‘신약’이다. 이 이름은 기독교의 고유한 말로 기독교의 경전의 성격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일면을 밝혀주기도 한다. 신약과 구약이 합쳐 있는 성경전서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요청이 들어 있는 계약서다. 축복과 저주의 갈림이 이 계약을 지키느냐 어기느냐에 달려 있다. -대한성서공회 제공

 성경과 성서는 어떻게 다른가요?

우리나라에서는 기독교의 경전을 ‘성경(聖經)’이라고 부를 것인지, ‘성서(聖書)’라고 부를 것인지, 가끔 논란이 된다.

거룩할 ‘성(聖)’ 자에 경서(經書) ‘경(經)’ 자를 쓰면 우리의 경전을 높여 부르는 이름인 것 같고, 거룩할 ‘성(聖)’ 자에 책 ‘서(書)’ 자를 쓰면 그 경전을 조금은 폄(貶)하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아서 굳이 성서라고 하지 말고 성경이라고 하자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약전서와 구약전서를 거룩한 경전이라고 하든 거룩한 책이라고 하든 크게 의미 구분이 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경전을 다만 중국 전통에서는 성경이라고 불러오고 있고, 일본 전통에서는 성서라고 부르고 있다. 우리는 이 두 전통을 융합하고 있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본래는 성경이든 성서이든 그것은 일반 종교의 경전을 두루 일컫는 보통명사다. 기독교가 우리나라에서 우세한 종교가 되면서 그 용어를 사유(私有)하게 된 것이다. 중요한 것은 기독교의 경전의 이름은, ‘성경’도 ‘성서’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기독교의 경전의 고유한 이름은 ‘언약서/계약서’다. 구체적으로는 ‘구약’과 ‘신약’이다. 이 이름은 기독교의 고유한 말로 기독교의 경전의 성격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일면을 밝혀주기도 한다. 신약과 구약이 합쳐 있는 성경전서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요청이 들어 있는 계약서다. 축복과 저주의 갈림이 이 계약을 지키느냐 어기느냐에 달려 있다. -대한성서공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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