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를 위한 신·구약 연구(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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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를 위한 신·구약 연구(4)
  • 승인 2004.09.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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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진의 신약 읽기

사복음서 <4> 예수님의 잉태와 탄생

마태복음 1장의 족보에 등재된 네 명의 여인의 존재는 마태복음의 보편적 성격을 시사하는 것 외에 또 다른 의미가 숨겨져 있다. 누가복음의 족보에는(눅 3:23~38) 전혀 기록되지 않은 이 네 명의 여인들의 등장에는 과연 어떤 또 다른 의미가 그 속에 내포되어 있는 것일까?

우선 이 여인들은 성적(性的)인 면에서 도덕적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제시하려는 의도가 분명한 마태복음에서 이런 부정한 여인들의 등장은 매우 당혹스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들을 기존의 유대적 관습과는 달리 주님의 족보에 포함시킨 것은 그 나름대로 명백한 의도 및 목적이 있는 것이다.

가장 설득력 있는 답변은 마리아와 관련된 의혹을 해소하려는 의도라고 생각된다. 마리아는 요셉과 정혼하고 아직 동거하지 않은 상태에서 성령으로 아기 예수를 잉태한 것이 드러나게 됐다(마 1:18). 당대의 유대 규례에 의하면, 처녀로 정혼한 상태에서 다른 남자와 동침하면 돌에 맞아 죽도록 되어 있었다(신 22:23~24). 우리는 성경을 통해 처녀 마리아의 아기 예수님 잉태가 성령 하나님의 역사인 것을 믿을 수 있지만, 당대의 사람들, 특히 마태교회 공동체 사람들에게 그것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주님의 고향 방문 기사에서 고향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불렀다(막 6:3). 유대 관습에 의하면 적자(嫡子)는 아버지의 아들로 불렸는데,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마 1:2)라는 표현을 들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마리아의 아들’, 즉 어머니의 아들로 부른 것은 그 아버지를 알 수 없다는 의미로서, 간접적으로 예수님이 사생아임을 지적하는 표현이었던 것이다. 마태복음의 기사에서도 역시 예수님의 모친의 이름만 언급되었지, 아버지 요셉의 이름은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마 13:55).

이처럼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하여 의혹과 의심이 있었던 까닭에, 저자 마태는 예수님의 조상 중에 마리아와 유사한 경험을 가진 여인들을 더불어 소개함으로써, 동정녀로서의 마리아의 아기 예수님 잉태를 변호하고자 했던 것이다. 아울러 위의 여인들의 비정상적인 성적 관계는 또한 장차 태어날 메시아가 남녀 간의 관계, 즉 부정모혈(父情母血)을 통하여서가 아니라, 인간적으로 볼 때 최고로 비정상적인 방식, 즉 성령 하나님의 능력으로 잉태될 것에 대한 예표로서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런 맥락에서 마태는 마리아의 예수님 잉태가 성령으로 된 것을 두 번씩 강조해 기록한다(마 1:18, 20).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여자에게서 태어난 것은 인간들의 죄를 구속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식으로 일하시고, 인간은 그 하나님의 일에 도구로써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도구로 쓰임 받는 사람은 복된 인생이 된다. 마리아의 예수님 잉태는 하나님의 일의 방식이 어떠함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한 증거인 것이다.

/교수·천안대 기독신학대학원

박종수의 구약 읽기

모세오경 <4> 선악과와 하나님의 심판

선악과를 따먹은 죄인은 아담과 하와, 뱀 등 모두 셋이다. 그 중에 인간을 유혹한 뱀이 가장 큰 벌을 받게 된다. 뱀은 저주를 받아 평생 기어다니게 되고, 아담은 종신토록 수고하여 그 소산을 먹게 된다. 여자는 해산의 고통이 크게 더해진다(창 3:14~17). 죽음 대신 내려진 형벌치고는 너무 가볍다. 사실 그것은 형벌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축복이다.

뱀은 태어날 때부터 배로 기어다니게 되어 있으며, 남자는 고래로부터 가정을 지키고 힘든 일을 떠맡았으며, 여자는 생명을 잉태하는 거룩한 창조의 사명을 감당하도록 되어 있다. 제각기 자기의 할 일을 떠맡은 셈이다. 만일 남자가 일거리가 없어 집에서 빈둥대기만 한다면 그것처럼 큰 저주가 또 어디 있을까? 그리고 만일 여자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석녀(石女)라면 그 고통은 어떠할까? 하기야 요즘은 독신자도 많고 아이 낳기를 거부하는 여자들도 종종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의적일 때 불만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선천적으로 자신의 권리를 빼앗긴다면 어느 누가 그 슬픔을 감당할 수 있을까? 어떤 이들은 사람이 죄를 짓기 전에는 고통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은 다음부터 산고(産苦)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아이를 낳을 때의 고통은 처음부터 있었다. 단지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이 ‘커졌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고통이 얼마나 커졌는지 알지 못한다. 성경 기자는 여인의 산고를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이 일들이 너무 힘겹게 느껴질 때가 있다. 히브리인들은 고통스러울 때마다 하나님 앞에 죄인된 인간을 생각하면서 선악과에 얽힌 이야기를 상고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땅이 저주를 받는다는 사실이다(창 3:17). 땅이 사람의 죄로 말미암아 저주받고 인간에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어야 한다. 사람의 몸체를 이루는 땅(흙)은 인간과 동떨어져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땅과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 일심동체이다.

그래서 히브리어로 인간은 ‘아담’(adam)이며, 땅은 그 여성형인 ‘아다마’(adama)이다. 즉, 인간은 남성이요 땅은 그 파트너로서의 여성에 해당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인간의 죄는 애매한 땅을 더럽히고 오염시킨다.

자연의 파괴는 결국 인간의 생명을 파괴하며 인간과의 조화를 깨버린다. 우리는 더 이상의 죄를 지어서는 안된다. 우리의 죄악 때문에 아무 죄 없는 땅까지 훼손시킬 수는 없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지어진 아름다운 세상은 윈래의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 우리는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땅 위의 모든 생명과 공존공생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 인간과 땅을 창조하신 목적이요 번성하라고 축복하신 목적이다.

/교수·강남대 신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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