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하고 영혼을 살릴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는 것이 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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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하고 영혼을 살릴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는 것이 목회”
  • 원주=이인창 기자 
  • 승인 2022.11.11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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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사명선언문] 문막평화교회 김재호 목사(강원노회장)

힘겹고 어려운 시절 이겨내고 목회의 길 순종
“오직 영혼구원”…푸드뱅크 등 이웃섬김 활발

어머니의 친정인 외가는 부자였다. 그러나 김재호 목사의 어린 시절은 가난했다. 아버지는 군 복무 중 어머니를 만나 그를 낳았지만,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폭력을 일삼던 새아버지 때문에 추운 겨울 돼지막사에서 동생들과 잠자야 했을 때도 있었다. 학교에서 불우학생에게 주는 학용품은 늘 그의 차지였다. 그에게 ‘아버지’라는 세 글자는 깊은 상처로 남았다. 

“서울 막내이모가 중3때 천호동 학교로 전학을 권유했고, 고2가 되어서는 안양에 살던 아버지 집에 들어가게 됐어요.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트라우마가 컸지만 배우고 싶었습니다. 동해바다를 보면서 품었던 함장의 꿈을 이루고 싶었죠.”

김재호 목사는 복음을 전하며 영혼을 구하는 목회자가 되겠다는 첫 마음을 끝까지 지켜가겠다는 각오다. 영혼구원이라는 사명은 이웃을 섬기는 목회 사역에 고스란히 묻어난다.
김재호 목사는 복음을 전하며 영혼을 구하는 목회자가 되겠다는 첫 마음을 끝까지 지켜가겠다는 각오다. 영혼구원이라는 사명은 이웃을 섬기는 목회 사역에 고스란히 묻어난다.

목회로 그를 부르시는 환상
해군사관학교 시험에 낙방하고 군대를 다녀와서는 대학 입시에 재도전하기 위해 주경야독을 시작했다. 낮에는 택시회사에서 경리과장으로 일했다. 사실 그 때는 공부보다 친구가 좋았다. 매일 술 마시고 노는 것이 일상이었다. 한번은 술자리를 마치고 길을 가다 남편에게 심하게 구타당하는 여인을 돕다가 큰 폭력사건에 휘말리는 일이 생겼다. 재판까지 받게 되면서 직장마저 잃었다. 그러나 그 시련은 은혜였다.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결정적 계기였기 때문이다.

“회사를 그만두고 집에 있었습니다. 아침에 밥 먹으라는 소리에 일어나 침대에 걸터앉았는데 꿈 같은 환상이 보였습니다. 앞은 캄캄한데 교회 소강대상에 제가 서 있고 졸졸졸 물소리만 들렸습니다. 가만히 보니 물소리가 아니라 사람들이 쓸려 내려오는 소리였습니다. 옆을 봤는데 아주 큰 날개를 한 장군 같은 천사가 저를 보고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할 정도로 아주 생생합니다.”

김재호 목사는 당장 무릎을 꿇었다.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갔을 때 말씀이 생각났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했는데 나는 무엇인가, 내 삶에 신앙이 없었다. 하나님께 한 번만 살려달라고, 다시는 하나님을 서운하게 하지 않겠다고 간절히 회개의 기도를 드렸다.  바로 그 순간 천호동 막내이모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유도 묻지 말고 당장 버스타고 올라오라는 것이었다.

이모들은 “어머니가 너를 주의 종으로 삼겠다고 했다”는 서원기도 이야기를 해주었다. 언젠가 한 번 들은 적이 있던 말이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소원이기도 하고 기도를 많이 하던 이모들의 말이니 따라보기로 결심했다. 아버지는 대뜸 “미친놈”이라며 호적에서 파겠다고 했지만 결심은 바뀌지 않았다.

“1991년 3월 방배동 신학교 입학 전 날 안양 친구들을 다 불러 모았습니다. 항상 친구들 모임의 주동자는 저였는데, 오늘 마지막으로 술을 사고 술 담배도 모두 끊겠다고 선언해 버렸습니다. 친구들은 얼마나 가는지 보자고 비아냥거렸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까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주경야독, 준비시키는 하나님
학비를 벌기 위해 낮에는 직장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낮에는 청계천 문구거리 도매상가에서 일을 했다. 누구보다 성실하고 책임감 있게 일하던 신학생에게 사장은 창고 4곳의 관리를 맡겼다. 깔끔한 성격도 큰 도움이 됐다. 당시 우리나라 세라믹 펜을 사러 해외 바이어들이 몰려 왔는데, 그는 007가방에 세라믹 펜을 누구보다 보기 좋게 디스플레이 하고는 서울시내 호텔 로비를 찾아다녔다.

무작정 부딪혀가며 외국인을 만나 거둔 수출 실적은 엄청났다. 이런 적극적인 도전은 훗날 그의 목회에 큰 도움이 됐다. 여기에 더해 주일에는 교육전도사로 사역도 시작했다.

“신학교 1학년에 들어가자마자 교회 사역을 했습니다. 이제 막 신앙생활을 한 처지라 아는 것도 없었죠. 그저 미안한 마음에 사례비 없이 부교역자로 일했습니다. 그러다 학부를 마치고 목회학석사 공부를 하던 중 강도사 신분으로 자연스레 개척의 길로 나가게 됐습니다.”

백석신학교에서 만난 아내와 개척을 준비하며 산기도를 많이 다녔다.  4살 난 첫째 아이를 집에 둘 수 없어 우주복을 든든히 입히고 함께 산으로 향했다. 김장용 비닐로 아이를 감싸고는 낙엽을 수북히 긁어모아 그 위에 눕혔다. 그리고 그 곁에서 주님께 부르짖었다. 

강원도, 충청도, 경기도 북부까지 개척을 위해 많은 곳을 돌아다녔다. 교회가 없는 마을이면 된다 생각했다. 원주 일대를 돌아보고 문막지역을 지나가는데 건축 중이던 작은 3층 상가 건물이 눈에 띄었다. 정보는 부족했지만 교회가 세워져야 할 곳이라고 생각되자 곧바로 계약을 했다. 사택을 구하는 데까지 사흘 만에 끝났다. 보증금을 떼일 수 있는 부도난 회사의 사원아파트를 얻었고 사택 거실에서 첫 예배를 드렸다. 1997년 7월 그렇게 문막평화교회는 시작됐다.

김재호 목사가 한결 같이 하나님께 순종하며 목회에 전념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원동력은 가족이다. 

믿음의 새역사를 쓰는 목회자

젊은 강도사는 성경만 들고 예수 믿을 것을 외치며 문막 곳곳을 누볐다. 주민들을 만나면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도제목을 작은 수첩에 적곤 했다. 

“아침밥을 먹고 나가면 점심 저녁을 다 해결하고 들어왔어요. 나가면 차와 과일, 음료, 밥까지 만나는 분들이 주십니다. 하루 커피를 10잔 마신 적도 있어요. 길에서 영접기도를 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등록 교인들이 차츰 생겨나면서 교회는 성장했습니다.”

열심히 목회를 했기 때문인지 자립도 일찍 한 편이었다. 교회가 없던 마을에서 예배당 건축도 이루어냈다. 

김재호 목사에게 있어 개척 이후 지금까지 한결 같은 목표는 ‘영혼 구원’이다. 그는 참 포도나무 되시는 예수님께 꼭 붙어 있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는 요한복음 15장 5절 말씀을 좋아한다. 믿음의 새 역사를 쓰는 목회를 하겠다는 뜻을 이루기 위해 준비된 목회자가 되겠다는 생각에, 경제학, 사회복지학을 공부하며 석사, 박사학위도 받았다. 여전히 치유상담학, 원어성경 연구를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있다. 김재호 목사의 목양실에는 설교 연구자료가 곳곳에 펼쳐져 있었다.

문막평화교회는 최근 ‘푸드뱅크’ 사역을 시작했다. 이 지역 사회복지계 대부 상지대 송정부 명예교수는 김 목사를 볼 때마다 푸드뱅크를 권했다. 이미 반찬봉사, 장학사업도 하고 있었지만, 반드시 필요한 사역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원주지역 푸드뱅크는 크게 부족한 실정이었다.

“교회 2층을 ‘동화 속 작은 도서관’으로 운영하면서 지역 주민들이 사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내주긴 했지만, 순수하게 목회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걸 생각해본 적은 없었죠. 그런데 교수님이 이웃사랑도 하나님의 말씀이라며 도전하셔서 우리 성도님들과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푸드뱅크 사역을 위해 결심이 서자 김 목사는 타던 승용차를 중고시장에 내다 팔고 교인들이 헌금한 비용을 모아 탑차를 곧바로 샀다. 푸드뱅크 사역을 활성화 되자 원주시 차원에서 문막지역 이상의 활동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래서 탑차에 새겨진 문구 ‘행복한 문막’은 ‘행복한 마을’로 바뀌었다.

교회 개척 25년을 지나면서 김재호 목사가 다시 써보는 사명은 여전히 ‘영혼 구원’이었다.

“전도하고 영혼을 살릴 수만 있다면 저는 뭐든지 합니다. 그것이 초심이고 그 마음을 끝까지 지키려고 합니다. 그것이 목회자로서 제 인생의 확고한 소망이고 비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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