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종이 흘린 눈물을 기억하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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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종이 흘린 눈물을 기억하시는 하나님
  • 유선명 교수
  • 승인 2022.11.08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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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명 교수의 예언서 해설(58) - “주께서 그들에게 보복하심을 나에게 보게 하옵소서” (렘 20:12)

예레미야는 바벨론 유배만이 아니라 바벨론에서의 복귀에 대해서도 예언했습니다. 때가 되면 다윗의 후손, 의로운 가지라 불리는 메시아가 오셔서 그들을 구원하리라는 약속이었습니다(렘 23:1~8). 다윗의 왕조와 맺으신 하나님의 언약은 폐기되지 않고 영적으로 승화될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유다 백성들은 회복의 예언은 귓등으로 흘리고, 예루살렘 훼파와 포로생활을 선언한 예언자를 핍박했습니다. 예레미야를 때리고 족쇄를 채워 가둔 사람은, 놀랍게도 ‘여호와의 성전의 총감독’이라는 직함을 가진 제사장 바스훌이었습니다(20:1). 성전의 제사장이 예언자를 폭행, 감금한 이 참담한 사태는 이미 다가오던 유다왕국의 멸망을 더 확실히 하는 징조가 되고 맙니다. 바스훌이 예레미야에게 한 일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바스훌의 이름을 바꾸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네 이름을 바스훌이라 아니하시고 마골밋사밥이라 하시느니라”(3절) 마골밋사밥은 “사방에 두려움이 가득하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바스훌을 두려워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에게 닥치는 일을 보고 두려움을 느끼게 되리라는 심판의 말씀입니다. 유다에게 닥칠 재앙은 이미 정해진 일이지만 바스훌이 그 재앙의 상징적 존재일 필요는 없었던 것을, 악행으로 매를 번 셈이지요. “바스훌아 너와 네 집에 사는 모든 사람이 포로 되어 옮겨지리니 네가 바벨론에 이르러 거기서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너와 너의 거짓 예언을 들을 네 모든 친구도 그와 같으리라”(6절)

사실 ‘두려움이 사방에’라는 문구는 예레미야가 심판의 메시지에서 종종 사용해 백성들의 귀에 친숙한 표현이었습니다. 유다의 현실만 아니라(6:25) 애굽의 앞날과(46:5), 아라비아 부족 게달과 하솔의 정치적 운명에 대해서도 같은 표현을 썼습니다(49:28~29). 바벨론의 정복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라는 예레미야의 입장을 싫어했던 유다 지배층은 ‘두려움이 사방에’를 예레미야를 조롱하는 별명으로 삼아 비아냥거렸습니다. “말끝마다 ‘두려움이 사방에’라니 참. 전능자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신데 기도하면 바벨론 따위를 물리쳐주시지 않겠어. 믿음 없는 예언자. 매국노 같으니…” 그런 비난 끝에 일어난 것이 바스훌의 행패였던 것이지요. 하나님의 뜻을 가장 잘 알아 섬겨드려야 할 제사장, 그중에서도 성전의 총감독이라는 사람의 포악한 행동에 하나님께서는 크게 진노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곁에 나아가 예배를 이끄는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위치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거슬렀던 바스훌은, 유다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세상에 보여주는 시범 케이스가 되고 말았습니다.


돌이켜보면 바스훌이 받은 처분은 예레미야의 기도에서 예상할 수 있었던 일입니다. “의인을 시험하사 그 폐부와 심장을 보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나의 사정을 주께 아뢰었사온즉 주께서 그들에게 보복하심을 나에게 보게 하옵소서”(20:12) 예언자로 부르시고 사명을 주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왜 이런 처지에 두시냐고 원망했던 예레미야입니다. 억하심정에 사명을 버리겠노라 투정하다가 그럴 수 없음을 고백하는 마음이 어땠을까요. “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됨이니라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8~9절) 하나님의 일을 하다보면 보상은커녕 저항과 비난, 위해를 당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 한숨과 원망을 쏟아도 대답이 없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억하시고 갚아주십니다. 당신의 종들이 흘리는 눈물을 병에 담고 계수하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시 56:8).

백석대 교수·구약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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