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성
시대의 오류·착오 되돌리는 결정
홍근수목사/전 향린교회 담임
지난달 26일(목) 헌법재판소는 악명 높은 국가보안법 제 7조 1.5 항이 규정하고 있는 고무·찬양죄와 이적 표현물 소지죄 등을 합헌이라고 만장 일치로 결정·발표했다. 24일 국가인권위원회의 전면 폐지 권고에 대해 일제히 환영 논평과 성명서를 발표했던 시민단체들은 헌재 결정에 대해 규탄의 목소리를 드높였다.
“헌재는 민주주의도 인권도 지켜낼 수 없는 기관임이 분명해졌다”고 한 논평과 같이 결정에 참여한 판사들은 국민의 정서를 모르는 사람들임을 스스로 입증한 것이다. 특히 그 결정이 요즘과 같이 국보법 철폐가 한창 논쟁되고 있는 이러한 예민한 때에 내려져서 헌재 판사들이 의도한 대로 국가보안법 존치에 힘을 실어주는 결과가 됐다. 물론 국가기관인 국가인권위원회에서는 국가보안법 폐지를 권고했으나, 열린우리당이 국보법을 폐지하라는 재야의 입장에서 후퇴라고 할 수 있는 개정론으로 기울고 있고 이번 헌재의 판결로 국민들의 국보법의 폐지에 대한 열망은 또 물건너 간 느낌이 없잖아 있어 여간 실망이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헌재의 결정에 대해 검찰은 당연하다는 입장을 취했지만, 대한변협, 인권운동사랑방 등에서는 헌재의 보수화에 대해 유감을 표시했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도 26일 논평을 내고 “심지어 한나라당 조차도 폐지 의견을 제시한 국가보안법 제7조에 대해 과거 권위주의 시대의 판결을 그대로 답습한 것으로 시대 착오적이라는 비판을 면할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최근에 합헌 결정을 한 헌재에서 그 결정문과 함께 보도 자료를 만들어 헌재가 보안법 폐지에 부정적인 입장이며 이런 결정 내용이 입법 과정에 반영돼야 한다는 의견을 배포했다. 그런데 이것에 대해 정치권에서 찬반 의견이 나오고 있으며 이는 매우 편파적이라고 하여 말썽의 소지가 되고 있다. 이에 당황한 헌재가 “연구관 개인 실수”라고 해명하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국보법의 운명이 헌재의 만장일치 판결과 열린우리당의 개정론으로 결국 개정 쪽으로 기울게 된 것 같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국보법 때문에 국제인권공동체로부터는 늘 폐지 권유를 받아왔고 심지어는 동맹국이라는 미국으로부터도 국보법 폐지 권유를 받아 온 터였다. 이 법으로 하여 우리는 인권 후진국 신세를 못 면할 뿐 아니라 그것이 반통일, 반평화, 반민주 악법이기 때문에 우리 자신의 민주화와 민족통일과 평화에 대한 의지가 의심스럽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헌재 재판관·국회의원·대통령 등도 모두 우리 손으로 선출한 사람들이고 이들의 보수화나 존재 그 자체가 우리들의 한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누구도 자신이 살고 있는 시공(時空)을 초월하지 못한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들에게 이 사실을 시사해 준다.
‘국가보안법폐지를위한시민연대’(국보법폐지시민연대)도 “헌법재판소는 수구·냉전적 사고에서 벗어나서 인권과 민주주의를 지키는 본래의 임무에 충실하라”는 논평을 내고 헌재의 결정이 시대착오적이며 국민을 도외시한 결정이라고 비난했다. 또한 “국민들은 과거 청산 차원에서 국보법의 변화를 원하고 있고 국회의원 대다수도 폐지 의견을 표명하고 있는 악법임에도 불구하고 국민 여론을 도외시한 채 그들만의 판결”을 하였다고 밝혔다.
한편 북은 27일 ‘보도’를 통해 한나라당 대표가 국보법 폐지안을 반대한 것과 관련, “북이 대남 적화 전략을 여전히 포기하지 않은 만큼 보안법은 필요하다는 악담을 했다”고 박근혜 대표를 비난했다.
반대
현 국가 상황, 폐지가 오히려 더 부당
한명국목사/서울침례교회
“여보세요. 거기 누구시오?” 감방 벽을 두드리며 ‘통방(通房)’을 시작했다. “예, 저는 김동길이요!” “김동길은 뭣 하는 사람이요?” “연세대 교수요. 댁은 뉘시오?” “예, 저는 목사요. 이름은 한명국이고 부산에서 왔소.” 이렇게 하여 우리 두 사람은 구두인사를 나눴고 일심 재판이 끝나 그는 안양교도소로 이감될 때까지 4개월간 가장 가까운 옆방 옥중 친구가 됐다.
그 때는 1974년 4월 ‘긴급조치’ 하에 교도관의 감시가 삼엄했다. 이튿날 오후 감방 구석에 있는 똥통(플라스틱 쌀통을 방마다 두어 똥오줌과 밥 먹고 그릇 씻은 물 기타 세숫물을 모아둠)을 오물수거차에 날라주고 올라오면서 우리는 초면 인사를 나눴다. 그는 수번 위에 노란 딱지를 붙였고 나는 빨간 딱지를 붙였다.
담당 교도관이 퇴근하고 야간 교도관으로 교체된 뒤 식사시간이 끝나면 ‘마포종점’ 노래가 들려오고, 그 때가 통방하기 쉬운 기회였다. “김교수님께서는 무슨 죄목으로 들어왔소?” “국가 전복 반란 음모죄로 들어왔소.” “목사님은 무슨 죄로 들어왔소?” “저는 보안법, 반공법 그리고 형사소송법 몇 조라고 적혀있는 죄목이요.” 우리는 엄청난 국사범으로 서대문 구치소 9사(舍)에 들어온 것이다.
세월이 지나 김 교수는 2년의 옥고를 치르고 나왔고 나는 항소심에서 집행유예 3년으로 나온 후 30년이 지나는 동안 가끔 만나곤 하는데, 요사이 보안법 폐지가 왜 들먹거리는지 알 수가 없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재임 시에 보안법 폐지 운운 한 일이 있어 당혹했고, 현 노무현 대통령도 같은 말을 한 것이 기억나는데, 대통령 선서에서 “… 국가를 보위하고…” 라고 다짐하면서 ‘국가보안법이 그렇게 국가 보위에 거침돌이 되는가?’ 라고 의혹의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법을 공부하지 않아서 법은 잘 모르나 법철학이나 법운용에 대한 기본 양식은 교도소 생활 8개월 동안에 제법 익혔다. 또 보안법 조항과 내용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조항은 10조 남짓하여 얼마 되지 않지만 참 지켜야할 법이요 국가 보위의 엄한 법이었다. 필자는 국가보안법의 피해자라고 해도 보안법 폐기를 주장하지 않는다. 자신이 보안법 피해자라고 해서 법을 폐기한다면 대한민국에 무슨 법이 남아있겠는가? 필자의 소견으로나 버스, 택시, 전철 등에서 만난 대다수의 사람들은 보안법을 그대로 보존하는 것을 옳게 여기고 있었다.
필자는 4.19 데모에 참여한 것을 늘 후회하고 있다. 4.19 후 필자의 외삼촌이 민주당 국회의원이 됐고, 국회를 방청한 일도 있었다. 장면 총리가 일본 사또 수상을 대동해 오른쪽 옆에 임석하자 곽상훈 의장의 사회봉이 두드려졌다. “의장, 의장!” 소리를 크게 지르는 사람에 발언권이 돌아왔는데 인제에서 초선 의원이 된 김대중 씨였다. 필자는 정치꾼들의 정권 야욕과 선동에 합세하여 민주화운동에 깊이 관여했던 것이 남산에 간 이유 중 하나였음도 알게 됐다. 그러나 목회자가 된 후 많은 세월 동안 역사에 참여하고 역사를 지켜보면서 무엇이 달라졌는가를 반문해 본다.
어떤 법이든 법이 나쁜 것이 아니라 지키지 않기 때문에 더 나쁜 것이다. 정치가나 일반 대중이나 권력자나 약자나 할 것 없이 법은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적용되고 지켜져야 한다. 보안법도 나라를 지키는 법인 이상 혹시 약간의 수정은 몰라도 개정이나 폐기는 있을 수 없다고 보는 것이 마땅하다. 유럽과 같이 안정된 몇몇 나라들도 우리와 같은 보안법을 갖고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하물며 우리나라와 같은 현실에서 보안법을 폐기하는 것은 더욱 부당하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