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문명문화는 단순하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랜기간을 두고 살아오면서 얻어진 체험의 축적과, 세상이 바뀜에 따른 인간의 본질적 적용과 더불어 얻어진 위대한 배경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필자는 이번 여름방학 기간 동안 미국과 캐나다를 선교방문하면서 너무나 많은 것을 보고 느꼈다. 그중 짧은 기간에서나마 성경적 가정관을 얻을 수 있었다.
캐나다 여행 중에 모 목사님의 가정을 방문할 수 있었다. 어떤 날 아침이었다. 부모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있는 딸 하은이가 부엌에 있는 엄마에게 달려갔다. “엄마, 오빠 혼내줘요. 오빠가 나를 괴롭혀요. 불러다 혼내줘요.”
그러나 이 말을 들은 엄마의 대답은 달랐다. “하은아, 엄마를 봐. 오빠가 널 괴롭힌 게 아니라 하은이 네가 오빠에게 잘못을 했기 때문에 오빠가 그랬지. 그것은 너를 괴롭힌 것이 아니라 네 잘못을 말한거야. 하은이가 오빠한테 잘못했다고 빌어. 그리고 용서를 구해.”
엄마의 음성은 정확했다. 꾸지람도 호령도 아닌 자애로운 모성애로 타이르는 주 안에서의 교양이다. 상황이 오히려 역전된 하은이는 본능적인 꾀가 생겼다. 오빠한테 정면으로는 못 가고 휘장 옆에서 반쯤 얼굴을 내밀고는 작은 목소리로 “미안해” 하고는 무마해 보려는 얕은 수법을 썼다. 그런데 더욱 놀란 것은 오빠의 태도다. 의자에 정자세로 앉아서 “하은이는 그렇게 용서를 구하면 안되지. 오빠한테 정식으로 잘못했다고 해야지”라고 말했다.
궁지에 몰린 하은이는 오빠 앞에 가서 정식으로 “오빠, 잘못했어”라고 사과했다. 그러자 오빠는 “알았어”라고 말했고, 엄마 또한 “하은이, 앞으로는 그러면 안된다”라고 따끔하게 충고했다. 하은이 또한 “예”하고 마무리됐다.
또 감동을 받은 것은 이런 대화 속에 그 아버지 목사는 한마디도 없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에베소서 6:1 이하에 나타나는 성도들의 가정의 모습이 아닌가 한다. 필자는 여행 기간 중 이 짧은 시간에 얻어진 미국의 가정 문화를 접하면서 한국의 기독교 가정이나 필자가 시무하고 있는 대학의 학원문화로 적용할 귀감으로 받아들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