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대로 믿음대로 살고자 했던 신앙인들의 역사가 이곳에
상태바
복음대로 믿음대로 살고자 했던 신앙인들의 역사가 이곳에
  • 강화=이인창 기자 
  • 승인 2022.09.28 14:4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강화의 신앙유산 집대성 ‘강화기독교역사기념관’

강화 지역교회와 강화군 함께 올해 3월 개관
복음전파 역사, 선교사역, 호국신앙 등 소개

코스모스 피는 가을 한복판, 우리 자녀들과 함께 역사의 섬 강화도로 훌쩍 떠나보는 건 어떨까. 빈번한 외세 침략의 굴곡진 역사를 간직한 땅, 그러면서도 일찍이 복음이 전래 되어 교회가 구국운동의 산실 역할을 했던 곳, 강화도다. 

올해 3월 강화도에 강화기독교역사기념관(강화군 강화읍 강화대로 154번길 12-21)이 문을 열었다. 1993년 강화 기독교 선교 100주년 기념사업회를 중심으로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다 재정 부족으로 중단됐던 사업이 30년 만에 결실을 맺었다. 2020년 지역 교회들이 뜻을 모아 ‘강화기독교역사기념사업회’(이사장:최훈철 목사)를 결성해 다시 사업을 추진했다. 여기에 강화군이 나서 군비 77억원을 투입하면서 연면적 1,977㎡(579평), 지상 2층 규모로 건립할 수 있었다. 강화기독교역사기념관을 방문하면 강화도 최초의 기독교 전파과정, 초기 선교사역, 신앙인들의 호국정신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올해 3월 개관한 강화기독교역사기념관은 강화도 최초의 기독교 전파과정, 초기 선교사역, 신앙인들의 호국정신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다. 

호국신앙의 산실, 강화도 교회
“강화학교 축구팀이 브라이들 신부에게 수년간 세심한 훈련을 받았다. 선수들이 좀 더 체계적인 훈련을 받는다면 잉글랜드 리그 진출도 가능하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서 활약하고 있는 손흥민, 황희찬 선수 시대 이야기가 아니다. 1901년 8월 영국 성공회 선교잡지 ‘모닝캄’에 나온 기사 내용이다. 바로 강화도가 우리나라 유소년 축구의 발상지라는 사실을 기념관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강화도에서는 1893년 감리회와 성공회가 먼저 사역을 시작했다. 인천 내리감리교회 존스 선교사가 이승훈의 어머니에게 배 위에서 세례를 베푼 것이 계기였다. 성공회 워너 선교사는 강화의 관문 동쪽 갑곶에 성니콜라성당을 만들었고 그곳에서 고아 사역을 시작했다. 기념관에서는 바로 이러한 기독교 역사의 시작과 발전을 한눈에 볼 수 있다. 

기념관에 들어서면 ‘성령의 땅, 강화’라는 큰 글씨 아래 신앙유산을 계승해 복음을 전하고 있는 지역교회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그 옆에는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의미에서 전시된 ‘기억의 종(鐘)’이 맞이한다. 예배 시작을 알리던 옛 교회 종을 가져와 전시했다. 

기념관은 상설전시관과 어린이 체험관, 수장고, 카페테리아, 공동집회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1층 전시관에서는 민족 근대화와 독립운동의 횃불을 들었던 신앙 선배들의 삶과 정신을 들여다볼 수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를 역임하며 항일운동에 앞장섰던 성재 이동휘 선생(1873~1935)이 바로 강화중앙교회 출신이다. 3.1만세운동을 주도한 유봉신 선생(일직교회)도 이곳 출신 독립운동가다. 3.1운동 당시 강화도에서만 1만 여명이 만세운동에 참여했고, 강화지역 교회들은 만세운동 근거지 역할을 했다. 더리미 순교터, 강화읍성공회성당 등 나라를 지키기 위해 핍박을 마다하지 않았던 선열들의 역사도 담아내고 있다. 

강화기독교역사기념관 이사장 최훈철 목사(양진감리교회)는 “강화도에 복음이 들어와 어떻게 발전하고 삶에 영향을 끼쳤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민족 근대화의 뿌리가 되고 강화 기독교 선열들의 유산을 집대성한 곳인 만큼 많은 성도들이 찾아오시면 은혜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기념관에는 오래 전 강화도 신앙인들이 사용했던 유산들이 잘 전시되어 있다.
기념관에는 오래 전 강화도 신앙인들이 사용했던 유산들이 잘 전시되어 있다.

해설사로 섬기는 목회자들
강화기독교역사기념관에서는 지역 목회자들이 자원해 해설사로 섬기고 있다. 매주 봉사자로 활약하고 있는 유수현 목사는 하나라도 더 강화도 교회 역사를 설명해주기 위해 매번 목청을 돋우고 있다. 

목회자들은 교산교회와 니콜라회당으로 시작된 강화도 기독교 전파 과정, 강화 기독교인의 삶, 기독교를 계기로 구축된 교육·문화·의료체계, 그리고 이 땅에서 복음을 전했던 선교사들의 흔적을 세세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강화의 기독교 역사를 전하면서 제가 더 은혜가 되고, 관람객들이 뜻깊게 반응해 줄 때 보람이 정말 큽니다. 연말에 다시 시설을 정비하면 더 좋은 모습을 선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기념관을 걷다 보면 볼거리가 넘친다. 여성 선교를 하다 1909년 풍토병으로 생을 마감한 로다 선교사 묘비, 김희준 초대 한인 성공회 사제 서품증, 강화부흥회기록, 주일성경보통공과, 110년 된 ‘구약젼셔’, 오래된 성구,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감리회 ‘교리와 장정’, 교회 당회록, 1896년 내한했던 휘트모어 선교사 가방 등 강화도에서만 볼 수 있는 유산들이 가득이다.  

강화기독교역사기념관 전경

뜨거웠던 ‘마리산기도운동’ 역사
강화도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신앙 역사가 하나 있는데, 바로 ‘마리산기도운동’이다. 1903년 원산대부흥운동,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은 잘 알려져 있지만, 성령의 임재로 뜨거웠던 마리산기도운동은 생소하다. 기념관에서는 강화도 마리산기도운동을 집중 조명하고 있다. 

기독 사학자들은 마리산기도운동이 한국교회 새벽기도회를 정규집회 형태로 자리잡도록 한 계기라고까지 평가한다. 한국교회사적 의미가 크다는 것이다. 

마리산기도운동은 1915년 5월 옹암교회 새벽기도회에서 시작됐고, 세 차례에 걸친 강력한 부흥 집회로 많은 강화 주민들이 회심하는 역사가 나타났다. 이 때 예수를 믿은 주민들은 1919년 강화만세운동으로 연결됐다. 마리산부흥운동의 역사는 1960년대까지 이어졌으며, 그 사이 황해도 해주, 경기도 김포까지 영향을 미쳤다. 

전시물 중에는 1959년 6월 ‘감리교생활’의 기록도 눈길을 끌었다. 

“난정교회 청년회는 동네를 완전히 크리스도화 할 목적으로 농촌살림에 쪼들리면서도 30,000여 환의 라디오를 사다 놓고…(중략)…사랑방에 둘러앉아 화롯불을 쪼이며 라디오 소리와 함께 하루의 피로를 회복하면서 복음 전도의 신생활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 전파를 위해 쌀 160kg을 구입할 수 있는 돈으로 라디오를 구입했던 당대 청년들의 순수함과 열정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느껴졌다. 

유천호 강화군수는 “강화도 기독교인들의 사랑과 희생정신이 잘 계승될 수 있도록 역사기념관이 중요한 역할을 하길 바란다. 시대정신과 가치를 재창출할 수 있도록 기념관을 발전시켜 나가겠다”고 전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