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열어주신 목회, 이제는 알곡 성도 길러낼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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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열어주신 목회, 이제는 알곡 성도 길러낼 때”
  • 이인창 기자
  • 승인 2022.08.24 11: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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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사명선언문] 서부영락교회 조래자 목사

13년 부교역자 생활 후 2007년 교회 개척
암 투병에도 강단 지켜, “백석, 목회에 큰 힘”

그저 열심 있는 교인으로 평생 신앙생활을 할 줄 알았는데, 하나님은 새로운 사명을 주시며 신학교로 보내셨다. 십년이 넘도록 여전도사로 교회를 섬기다 은퇴할 줄 알았다. 이 때도 하나님은 뜻을 두고 개척의 길로 인도하셨다.

개척 당시 손주까지 보았던 나이, 조래자 목사(서부영락교회)는 기도하며 받았던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 있게 개척 출사표를 던질 수 있었다. 목회의 길을 걸어오며 여성목사에 대한 선입견 때문에 힘들 때도 있었지만 꿋꿋하게 버텼다. 병마도 이겨냈다. 올곧게 목회에 전념하며 15년 동안 서부영락교회를 부흥으로 이끌었다.

서부영락교회 조래자 목사는 늦은 나이에, 여성이라는 선입견을 극복하며 교회 부흥을 이끌었고, 4곳의 지교회도 설립했다.
서부영락교회 조래자 목사는 늦은 나이에, 여성이라는 선입견을 극복하며 교회 부흥을 이끌었고, 4곳의 지교회도 설립했다.

“하나님께서 제 선율을 받으셨습니다”
조래자 목사가 처음 교회에 나간 때는 8살 즈음이다. 5촌 당숙의 전도를 받고 온 가족이 충남 진천에서 4킬로미터 남짓 떨어진 교회에 출석했다. 어린 시절부터 교회 안에서 믿음 좋은 청년으로 성장했다. 교회학교 교사, 성가대원, 반주자로 섬기다 1978년 결혼했다. 

경기도 용인에서 신혼생활을 할 때에도 주일예배를 빠진 적 없었고 기도생활도 열심이었다. 돌이켜보면 자기 열심히 컸던 때였다고 조 목사는 회고한다. 그러다 1990년 기도원에서 기도 하던 중 특별한 경험을 하면서 신앙의 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입신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저한테는 스트레스가 하나 있었어요. 저만의 방법으로 반주법을 터득했는데 정식으로 배우지 못했다는 열등감이 있었던 거죠. 사람들이 놀라워하며 어떻게 하는 거냐고 물어보면 설명할 길이 없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제가 반주해 올려드리는 선율을 받으시는 것을 환상처럼 보았습니다. 그 경험 후 자유로워졌다고 할까요?”

풍금부터 시작해 피아노, 전자오르간까지 독학으로 익힌 모습을 보고 주변에서는 칭찬일색이었다. 하지만 조 목사 내면에는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었던 것. 그 부분을 하나님께서 해결해주셨다. 

그 날 이후 조 목사는 견딜 수 없는 기쁨에 사로잡혔다. 춤을 추고 찬양하고 다닐 정도로 감사가 흘러넘쳤다. 그런 성도의 모습을 보고는 출석 교회 목사님은 신학을 공부해보라고 적극 추천하고 직접 입학서류를 챙겨주었다. 등록금까지 지원해주었다. 자녀를 길러야 하고 경제적으로 힘들 때였지만 조 목사는 결심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로 했다. 

개척 목회까지 연단시키는 하나님
신학공부를 한 후 조래자 목사는 수원의 한 대형교회에서 13년 동안이나 여전도사로 시무했다. 수많은 부교역자들이 교회를 거쳐 가는 동안에도 자리를 지키며 맡은 사역을 묵묵히 수행했다. 교회와 담임목회자 곁을 지키고 교인들을 섬기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당연히 힘들어서 떠나고 싶은 때도 있었습니다. 인내하고 버텨낸 거죠. 늘 하나님 편, 목사님 편에 서려고 했기 때문에 성도들도 인정을 많이 해주었습니다. 13년 동안 조직, 행정, 추진력을 경험해 개척 목회를 담대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조 목사는 개척하겠다고 덤벼들지 않았다. 2년 3개월, 기도일지를 쓰며 하나님의 뜻을 물었다. 개척을 목표하자 연단이 시작됐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2007년 수원시 변두리 한 상가에서 서부영락교회를 개척했다. 

그런데 일 년 동안 아무리 전도하고 노력해도 등록하러 온 교인은 없었다. 

“가족들하고 예배를 드렸죠. 처음으로 한 분이 오셨는데 노숙자였습니다. 일단 유아실에서 먹이고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지나 월세를 얻어주고 반찬도 해다 먹이며 자립을 도왔어요. 신기하게 그 때를 기점으로 교인들이 등록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뜻하지 않는 고난이 조 목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병원을 찾았다가 위암 3기 판정을 받은 것이다. 개척 1년 만이다. 이제 목회는 끝났다 싶었다. 하지만 기도로 시작한 개척 목회를 이렇게 마칠 순 없었다. 

“오기가 생기는 겁니다. 부교역자 시절의 열정도 생각나고, 목회를 더 하고 싶었습니다. 7월에 수술하고 한 달 만에 강단으로 복귀했습니다. 오히려 그해 성도가 서른 명으로 늘었습니다. 이듬해에는 10명의 임직자를 세웠고, 다시 이듬해에는 개척 3년 만에 건물을 매입해 예배당을 갖게 됐습니다.” 

물론 재정은 턱없이 부족해 버거운 결정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용기를 주셨고 교인들이 전적으로 따라주었다. 조래자 목사는 개척 때부터 내 교회만을 키워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선교와 구제를 놓지 않는 ‘나눔목회’가 비전이었다. 개척을 하면서 필요한 곳이면 조금이라도 후원으로 동역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용인서부영락교회, 안성산대은평교회, 광주영원한찬양교회, 모현서부영락교회 등 4곳의 지교회를 설립한 것도 마찬가지 뜻에서다. 한국나눔사랑봉사연맹 이사로 활동 중인 조 목사는 매주 인근 공원에서 펼치고 있는 어르신 나눔봉사에도 꾸준히 참여하고 있다. 

“알곡 성도 만드는 데 집중할 터”
조래자 목사는 백석총회에 가입하고 2013년 백석대 실천신학대학원 ATA과정 1기를 수료 후 총동문회 초대회장을 역임했다. 교단 내 부흥사회와 여교역자회에서도 적극 활동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노회장까지 역임하며 백석총회에 뿌리를 단단히 내렸다. 

2008년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열렸던 백석전진대회에 조 목사는 교인들과 참석했다가 백석의 위상을 보았다. 백석대 신대원을 졸업한 사위와 부교역자들로부터 백석에 대한 좋은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호감을 갖게 돼 교단 가입까지 하게 된 것이다. 조 목사는 백석과 함께한 이후 목회가 더욱 안정됐다고 한다.

특히 조 목사는 목회를 돌아보면 늘 곁에서 든든한 지원군이자 버팀목이 되어준 가족이 감사하다고 했다. 조 목사를 만나 신앙생활을 시작했던 남편은 장로가 되어 지금까지 목회 사역을 동역하고 있다. 세 딸과 사위들, 손주들까지 같이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큰 축복임에 틀림없다고 고백한다.  

조래자 목사는 코로나를 겪으면서 목회 방향과 사명을 새롭게 정립하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알곡 성도를 만들자는 겁니다. 코로나를 겪으면서 신앙의 뿌리가 약한 교인들이 쉽게 떨어져 나가는 것을 봤잖아요. 사랑하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늘에 소망을 둘 수 있는 목회를 펼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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