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구는 저의 사명, 신뢰를 심으면 결국 싹은 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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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구는 저의 사명, 신뢰를 심으면 결국 싹은 돋습니다”
  • 이인창 기자
  • 승인 2022.08.09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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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구 제작 외길 걸어온 성애성구사 대표 임선재 장로

1967년 성애성구사 설립 후 한국교회와 55년 동행
일본·중국 등 해외도 보급…미국 ‘사우더’사와 협약
성애성구사 대표 임선재 장로는 55년 동안 성구를 제작하는 외길 인생을 걸어왔다. 최고의 성구를 만들고 있다는 자부심이 크다.

“성구는 하나님께서 이 땅에 저를 보내신 이유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제게 항상 기적을 베풀어주셨어요. 지금의 성애성구사가 있을 수 있는 비결이지요.” 

지난 1일 경기도 오산시 성애성구사 본사에서 만난 임선재 장로(봉천감리교회)는 ‘기적’이라는 단어를 자주 언급했다. 55년 역사를 달려오는 동안 하나님께서 베푸신 기적들이 없었다면, 성애성구사는 없었을 것이라고 그는 단언했다. 한국교회 부흥 성장기 역사와 맥을 같이 하면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결코 편한 길만은 아니었다. 수많은 성구 기업들이 세워졌다 사라진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온갖 역경을 기적처럼 이겨내고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는, 현존하는 최고(最古) 성구 기업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은혜였다.

임선재 장로는 믿음의 기업을 일궈오면서 농토에 씨앗을 심는 원리를 최우선 원칙으로 지키고자 했다. 그는 “사람들의 마음에 신뢰를 심으면, 신뢰를 얻는 것이다. 그 마음을 옥토로 만들어서 신뢰의 씨앗을 심었을 때 20년이 지나고 30년이 지나서도 싹을 돋우는 것을 항상 경험해왔다. 한국교회가 위기라고 하지만 심어둔 씨앗이 있어 염려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했다. 

가진 것 없어 더 주님께 매달려
임선재 장로가 20대 초반 상경했을 때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충남 예산 시골마을에서 자라 학력이라곤 고등성경학교가 마지막이었다. 인맥도 돈도 없었다. 부모에게 물려받은 건 신앙뿐이었다. 

임선재 장로의 조부는 병석에서 예수를 영접했다. 병을 치료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했지만 차도가 없던 차에 “할아버지 예수 믿고 천당가세요”하는 손주의 말에 마음을 움직였다. 이내 교회 전도사님을 모시고 예배를 드리고 예수님을 영접했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기 2주 전 ‘자신은 예수 믿고 천국에 가니까 상복도 입지 말고 곡도 하지 말고 조촐하게 기독교식 장례를 치르라’고 유언을 하셨습니다. 마을이나 집안사람 누구의 반대도 듣지 말라고 하셨고 자식들은 그대로 따랐지요.”

효자였던 임 장로의 부친은 아버지의 유언을 지켰고, 온 식구들이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곧장 술 담배마저 끊고 새벽기도부터 철저히 지키는 신앙생활을 했다. 자신이 마시지 않는 술을 내어줄 수 없다며 품앗이 일꾼들에게 술을 주지 않아서 곤욕을 치러야 했다. 하지만 신앙에 흔들림은 없었다. 

그런 부친의 신앙유산을 안고 상경한 임선재 장로는 1967년 서울 관악구 봉천동에서 성애성구사를 설립하게 된다. 목공을 하는 손재주는 일찍부터 있었던 듯하다. 고등성경학교 때 교내 고장 난 학교 물품을 자청해 수리하곤 했다. 상경 후 공사장에서 일하던 그는 교회 건축만 전문으로 하는 목수 장로를 따라다니며 목공 기술을 배웠다. 군대 가기 전 당시 섬기던 봉천감리교회 증축을 도맡다시피 할 정도로 기술은 일취월장 했고 섬김에도 열과 성을 다했다. 

“건강도 없고 물질도 없고 사회적 배경도 없었습니다. 심장이 좋지 않아 의가사제대를 하고 말았어요. 어디에도 의지할 곳이라고 없었기 때문에 주님만 더 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참 좋은 분들을 늘 만나게 해주셨고, 지금까지 평생 교회를 위해 일하게 하셨습니다.”

성애성구사 입구 전경

명품 성구가 제작되는 비결은?
성애성구사는 1970~80년대 한국교회 부흥기와 맞물리면서 기업을 더 성장시킬 수 있었다. 임 장로는 워낙 일감이 많아서 감당하기 힘들 정도였다고 기억하고 있다. 그렇다고 승승장구만 한 것은 아니다. 위기는 항상 찾아왔다. 직원과 자재를 구하지 못해 발을 구를 때도 있었다. IMF 당시 많은 중소기업이 무너질 때 살아남은 게 기적일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임선재 장로는 기도의 역사를 항상 체험해왔다고 고백한다. 생사고비를 넘나드는 심장 수술을 이겨낸 것도 기도의 힘이었다. 특별히 오산공장과 관련해 이야기할 때 그는 다시 한번 ‘기적’이라는 단어를 꺼내들었다. 

“오산공장을 위해 땅을 샀는데 도로가 없는 맹지였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바뀌어 도로를 접한 부지를 추가로 더 확보해서 공장을 더 넓힐 수 있었습니다. 재정 문제도 풀어주셨습니다. 봉천동에서 시작해 의왕공장 시대를 거쳐 1983년 9월 오산공장 기공예배를 드렸습니다. 이곳에서 전국 교회에서 사용하는 수많은 성구들이 제작되는 것이 은혜이고 기적입니다.”

오산공장 회의실 한켠에는 전국 수많은 교회에서 전달한 감사패가 가득 비치되어 있다. 오산공장 사무동에는 큰 성구 전시실이 2개나 갖추어져 있다. 수준 높은 디자인과 품격 있는 성구들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성애성구사는 독창적인 디자인으로 이미 오래전부터 많은 교회의 사랑을 받아왔다 정동제일교회, 새문안교회, 광림교회, 사랑의교회, 할렐루야교회와 같은 초대형교회부터 농어촌교회 개척 교회까지 이곳에서 만들어진 성구를 사용하는 이유다. 

성구업계 최초로 도장라인 자동화 시설을 도입하기도 했다. 실제 사무동 맞은편 큰 공장들 안에서는 목재를 다듬어 말리고 가공한 후 도장 작업이 한창이었다. 이미 제작된 성구들은 포장을 마치고 배송을 준비하고 있었다. 유명 가구 브랜드까지 제작을 의뢰할 정도로 성애성구사의 제품 완성도는 대단하다.

성애성구사와 임선재 장로가 복원한 중국 내 성공회 교회 모습
성애성구사가 과거 소실됐던 중국 내 성공회 교회의 복원된 모습. 성애성구사는 해외로 뻗어가며 최고의 성구를 보급해오고 있다. 

해외 교회로 성구 보급하며 성장
성애성구사는 국내에 머무는 것을 넘어 이미 오래전부터 세계화 전략을 구체화 했다. 1991년 일본 나고야에 현지 법인을 설립한 이래 벌써 30년 세월이 지났다. 그동안 일본 전역의 교회에 성구를 납품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참 소중한 분들을 붙여주셔서 가능했습니다. 장로님 한분을 알게 돼 일사천리 진행됐습니다. 일본에서 법인을 설립하려면 당시 1천만엔, 우리돈 1억원 정도 든다는데 행정비 15만엔으로 가능했습니다. 또 제가 자랑스러운 게 중국으로 성구를 수출하는 것입니다.”

중국 여행을 갔다가 교회 건축을 하는 현장을 여러 곳 둘러본 임선재 장로에게 성구를 납품해줄 수 있냐는 제안이 중국측에서 온 것이 시작이었다. 종교성 산하 삼자교회에 2500석 의자를 납품하기도 했다. 

문화혁명 당시 폐쇄됐던 복강성 성공회교회의 성구를 복원했던 일은 지금 생각해도 감격스럽다. 단 몇 장의 사진만으로 완벽하게 고증하는 데 성공해 모두를 놀라게 했다. 다른 기업들은  중국 가구를 수입하는데 성애성구사는 오히려 중국으로 성구를 수출하고 있다. 국내에 보급되는 제품도 수입 없이 모두 오산공장에서 제작하고 있다. 

성애성구사는 미국 최대 성구사 ‘사우더’와도 협약을 맺고 미국과 캐나다 교회에서 사용할 수 있는 성구도 제작해 보급하고 있다. 70년 역사를 가진 사우더 성구를 국내에 독점 공급하는 지위도 확보했다.

“어디에 내어놓아도 자랑스러운 성구라고 자부합니다. 절대 신뢰를 얻으면 큰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해외 선교지에서도 주문이 오면 제품을 보내고 있습니다. 세계를 향해 뻗어가는 성구사를 위해 계속 기도하고 있습니다.”

“받은 은혜를 갚기 위해 나눕니다”
임선재 장로는 한국교회와 함께하며 받은 은혜를 갚기 위해 무던 애를 써왔다. 성애장학재단을 설립해 그간 200여명 후학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했다. 목회자세미나가 부족한 시절에는 오산 본사에서 유명 강사들을 모셔 목회자세미나를 오랫동안 개최했다. 성애성구사에서 일을 하다 목회자가 된 사례도 적지 않다. 6.25때 폭격으로 무너졌던 철원제일교회를 복원하는 일에 일조한 것도 보람이다. 현재는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임 장로는 성찬 가구를 구입한 어느 목회자가 “코로나에도 성찬을 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말을 흘려듣지 않은 적도 있다. 수소문 끝에 미국에 비대면 성찬키트를 만드는 회사가 있다는 정보를 듣고, 국내 최초로 수입했다. 얼마나 팔릴지 알 수 없지만 한국교회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해 결행한 일이었다. 

올해 79세 나이에도 건강하게 일을 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임선재 장로. 그는 여전히 자신이 받은 은혜를 한국교회와 우리 사회를 위해 나누고픈 마음이 가득하다. 그는 매일 새벽 5시 반 서울에서 출발해 전철을 타고 한 시간 40분이나 걸리는 출근을 해오고 있다. 

“건강이 좋지 않았던 제가 지금까지 일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기왕 장학재단을 만들었으니 더 키우고 미래를 위해 인재를 길러내고 싶습니다. 그것이 받은 은혜를 갚은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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