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렬한 체험으로 만나주신 하나님, 평생 목회자로 이끄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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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렬한 체험으로 만나주신 하나님, 평생 목회자로 이끄셔
  • 안양=이인창 기자 
  • 승인 2022.07.13 16:0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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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사명선언문] 안양충신교회 박종호 목사

정미소집 장남, 극적 신앙체험하며 믿음 결단
끝까지 목회 지켜, 신앙적 가치수호 첨병 역할

“중학교 3학년 때 술 담배를 완전히 끊었습니다.”

안양충신교회 박종호 목사는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도무지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꺼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중학교 3학년이라니…. 사실이었다. 정미소집 장손은 동네에서 내어놓은 개구쟁이였다. 아니 그의 표현대로 망나니 같았다. 초등학교 때 퇴학을 당할 정도였으니 정도를 가늠해볼 수 있을 듯하다. 

“그 때 예수를 만나지 않았다면 어디서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바로 위 누나가 우리 집안에서 처음 신앙을 가졌는데, 부흥회 마지막 날 꼭 한 번만 와달라고 졸라 교회에 갔다가 그곳에서 극적으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어느 겨울날 억지로 끌려 나간 교회 안에서는 찬송가 ‘변찮은 주님의 사랑과’ 1절과 4절을 반복해서 부르고 있었다. 여러 번 듣다보니 저절로 따라 부르게 됐고 눈을 떠보니 강대상 앞까지 나와 방언기도를 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어떻게 나갔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안양충신교회 박종호 목사는 중학교 3학년 영적체험을 하며 신앙을 결단한 후 흔들림 없이 목회의 자리를 지켜왔다. 신앙적 가치를 지켜내는 최일선에서 섬기는 역할을 묵묵히 감당하고 있다.
안양충신교회 박종호 목사는 중학교 3학년 영적체험을 하며 신앙을 결단한 후 흔들림 없이 목회의 자리를 지켜왔다. 신앙적 가치를 지켜내는 최일선에서 섬기는 역할을 묵묵히 감당하고 있다.

“얼마나 기쁜지 붕붕 떠다는 것 같아”
“하나님을 만나고 기쁨이 얼마나 대단한지 붕붕 떠다니는 것 같았습니다. 모든 것이 다 아름답고, 나무와 꽃이 노래하는 것 같아요. 신기한 건 술 냄새를 맡기만 하면 토했습니다. 담배 연기라도 마시면 머리가 부서질 듯 아팠습니다. 너무 기쁘니까 40일 동안 아예 교회에서 잤습니다.”

그날 밤 부흥회 강사는 중학생 박종호에게 방언을 글로 써보라고 분필을 쥐어주었다. 칠판에 알 수 없는 글자를 적은 그에게 다시 통변도 해보라고 했다. 교회에 처음 나간 중학생은 놀랍게도 디모데후서 4장 7~8절, 로마서 14장 8절 말씀을 읊었다. 

목사님이 영적 능력이 있는 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에게 예수님을 영접하고 이제부터 그 뜻을 따라서 하나님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후 목사가 되겠다는 뜻을 저버리지 않았지요.”

집에서는 난리가 났다. 아들은 학교에 갔다 오면 곧바로 교회에 가서 하지도 않던 공부를 했다. 또 밤 12시까지 성경을 읽고 기도했다. 아무리 아들이 개과천선했다지만, 집안 제사를 지내야 하는 장손이 예수쟁이가 됐으니 아버지는 노발대발 했다. 예배하는 도중에 끌려가기도 부지기수. 딸 9명에 아들 3명을 두었던 아버지는 장손에 대한 기대가 무너졌다. 더구나 큰아버지 집안이 이단에 빠져 몰락해버렸던 터라, 아버지는 더 아들을 막았다. 

“하나님 일은 바보스럽게 해야”
신학을 공부하고 싶은데 집에서는 어림없었다. 무작정 상경했다. 시외버스를 타고 당시 용산버스터미널에 도착했는데 갈 곳이 없었다. 누나와 한번 가봤던 말죽거리의 기도원이 기억나 발걸음을 옮겼다. 수개월 동안 나무를 해주고 기도원 방에 불을 때면서 머무르다 마침내 신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한국중앙교회 원로 최복규 목사님이 교수로 계시던 마포 동아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신학교 예배당에서 항상 울며 기도하던 저를 교수님들이 많이 사랑해주셨습니다. 일학년 후반기 잠실의 개척교회에서 전도사로 섬기게 됐습니다.”

박종호 전도사가 맡은 사역은 축호전도였다. 신학교 과정을 야간으로 변경하고 낮이면 하루 400가구 이상 초인종을 눌렀다. 하나님 일은 바보스럽게 해야 한다는 소신대로 열심히 전도했다. 하루 3~4명은 꼭 전도가 되었다. 계산 없이 사역하는 젊은 전도사를 담임목사와 성도들은 무척 아껴주었다. 

금방 교회가 부흥하면서 처우도 좋아졌지만 그는 이내 다른 선택을 했다. 또 다른 개척교회에서 도와달라는 요청이 오자, 만류하는 담임목사님을 설득해 임지를 옮겼다. 

“목동 일대였는데 당시 공장들이 많았습니다. 깔끔하게 차려입고 공장 앞에서 늘 전도지를 나누며 인사를 했습니다. 2개월 만에 청년 30명이 모였습니다. 그런데 3개월 만에 징집명령서를 받은 거예요. 아직 청년들의 신앙이 뿌리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이 급했습니다.”

입대를 앞두고 그는 저녁마다 청년들을 모아 저녁기도회를 시작했다. 자신처럼 체험신앙을 갖지 않으면 믿음이 금방 식어버릴 것 같았다. 말씀훈련도 같이 하면서 뜨겁게 기도하자 성령의 은사가 나타났다. 단 한사람도 빠지지 않고 영적 체험을 하게 되는 일이 벌어졌다. 그 안에 훗날 아내가 되는 여성 청년이 있었다. 

안양에서 40년 목회, 모든 것이 감사
박종호 목사는 1982년 제대 후 신학교에 복학하면서 곧바로 안양시 박달동에 개척했다. 총각으로 개척할 수 없던 시절이라 그야말로 개척을 위해 결혼했다. 신혼 자금을 교회 개척에 보탰다. 생전 처음 와본 안양에서 그는 지금까지 40년 동안 목회를 이어오고 있다. 

안양충신교회는 1990년대 지하 1층, 지상 5층 예배당을 건축했다. 재정을 아끼기 위해 박 목사가 직접 건축했고, 교인들도 팔을 걷고 벽돌을 날랐다. 문제는 대출 규모가 적지 않은데다 IMF까지 겹치면서 큰 어려움을 겪게 된 것. 경제가 정상화 되면서 이자 부담이 줄어 사정이 나아졌지만 이 때 박 목사는 중요한 결단을 내린다. 애써 건축한 교회를 더 필요한 곳에 내어주기로 한 것. 

박종호 목사와 교인들은 수익을 따지지 않았다. 그저 부채만 인수하고 모든 것을 양도하면서 청산할 뿐이었다. 땅 150평, 건평 500평이었으니, 시세대로 처분하면 부채를 갚고도 돈이 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익을 목적으로 예배당을 매각할 수는 없었다. 

“저와 성도들이 고생하며 예배당을 건축했던 소중한 기억이 있는 곳입니다. 어린이집도 우리 교회가 운영하고 있었는데, 권리금 없이 모두 양도하고 잘 정착될 때까지 수개월 동안 도와드렸어요. 2000년도 그렇게 다시, 상가 4층에 세를 얻어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목회자의 자리를 항상 지켜야 한다”
안양시를 기반으로 활발하게 활동했기 때문에 박종호 목사의 지역 네트워크는 매우 두텁다. 안양시기독교연합회에서 5년 동안 사무총장을 하면서 연합단체 사역을 시작했고, 2019년에는 경기도기독교총연합회 사무총장으로 섬겼다. 같은 해 시민단체 ‘건강한경기도만들기도민연합을 창립해 동성애 옹호를 시도하는 지자체 조례 재개정 시도를 최전방에서 차단했다. 지난해에는 인천시와 서울시 지역 기독교연합회와 연대해 수도권기독교총연합회가 출범하는 데 산파 역할을 했다. 

지난 5월 15일에는 국회의사당 앞에서 동성애를 옹호하는 평등법, 차별금지법 반대 국민대회를 개최했다. 많은 사람들이 어렵다고 부정적 의견을 냈지만 꼭 해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밤낮으로 추진했고, 약 3만 명이 모이는 성과를 거두었다. 지금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능력 있는 신앙인들이 드러나도록 앞마당을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많은 일을 하면서도 제가 항상 기억하는 것이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나는 목회자다, 목회자의 자리를 이탈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일을 하면서 제가 꼭 드러나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 역할은 멍석을 깔아주고 다재다능한 인재들을 도우면 그만입니다. 그것이 제게 있어 성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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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 2022-07-14 14:22:45
진정한 주님의종이고 하나님 나라를 지키시는 파수꾼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