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단한 개혁으로 확대 재생산 창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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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단한 개혁으로 확대 재생산 창출
  • 승인 2001.06.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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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첫 6월을 맞이하는 감회는 남달리 새롭기만 하다. 가뭄을 걱정하는 농부들의 시름이 함께 하기에 더욱 절박한 느낌이다. 저명한 교회의 모 목사님은 갈급한 심령들에게 “이대로는 안된다, 변해야 된다”고 예언자적인 메시지를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개혁이 개악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좌시하는 것이 능사가 아님을 지적한 것이다.

진실로 개혁의 동기는 이번 6월이 잉태한 최상의 선물로 기록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왜냐하면 6일이 46차 ‘현충일’이요 15일은 ‘6·15 남북공동선언’ 1주년이며, 25일은 자유수호를 위한 ‘6·25 한국 전쟁’ 51주년이 되는 날이기에 개혁의 계기를 삼을만한 충분조건으로 볼 수 있는 달인 것이다.

모름지기 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살리는 개혁이란 철저한 회개에서부터 시작되고 그 바탕 위에서 결단의 변화가 일어나고, 이를 과감하게 실천에 옮김으로써 비로소 개혁은 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리고 이를 잘 유지함으로써 부단한 개혁의 확대 재생산이 이루어진다.

따라서 이번 현충일을 기하여 순국선열과 전몰 호국용사들의 값진 희생을 거울삼아 지도층 인사들을 비롯한 지식인 모두가 철저한 회개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들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더구나 우리 국민의 주역이 전후 세대임을 감안할 때 참전자의 증언을 교훈으로 새겨 들어볼 시한도 얼마 남지 않았음에랴!

아무튼 이때 희생한 전몰 호국용사와 상이군경, 그리고 무고한 민간인 등을 상기해 볼 때 저들이 피 흘려 지켜준 자유를 우리가 얼마나 소중하게 지켜왔는가에 대해 회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를 신장하고 보다 자유로운 복지국가를 이룩했다기 보다는 오히려 직권을 남용하고 악용한 물질만능주의적인 병폐로 겉잡을 수 없는 혼란과 패역으로 치닫게 된 결과에 대해 책임질 사람이 없이는 모두가 무너질 시점에 있기 때문이다. 비록 기독교인이라 하더라도 어느 사건이고 관계되지 않은 곳이 없다는 현실이 회개의 핵심 주제인 셈이다.

새롭게 결단을 내려야 한다. 책임질 일은 달게 지고 죄를 물리치되 우상(역술·점술·배금·사치·음란·마약)을 철저하게 제거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이 땅에서 제대로 행하는 주역임을 저마다 자부할 일이다. 누가 보건 안 보건 자진해서 섬기는 사역을 잘 감당하여 남의 자유를 방해하지 않으면서 각자의 자유를 거침없이 누릴 일이다.

한편 ‘6·15 남북공동선언’에서 약속한 대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답방이 이루어져 남북간에 평화가 정착되고 상호 화해와 신뢰를 바탕으로 교류협력의 내실을 기해가도록 힘껏 뒷받침해야 할 것이다.

정해영 장로 / 예비역기독교장교연합회 회장 남녀가 의복을 바꿔입는 행위는 ‘창조질서 어기는 행위’

> 신명기 22:5에 ‘여자는 남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요 남자는 여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에도 적용되어야 합니까?

여기서 ‘남자의 의복’이란 남자에게 속한(히브리어로 keli, 즉 What pertains to, ∼에 속한 것) 의복이라고 하지만 애매한 표현인 것 같습니다. 다른 경우에는 용기(그릇), 콘테이너의 뜻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도구, 장비, 무기 또는 장신구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 뜻이 장식품이나 귀금속품을 말하기도 하지만 이 본문에서는 의복을 말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본문 후반부에서 말한 simlah는 외투를 의미하지만 실은 몸을 가리는 모든 종류의 의류를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것은 두 성(性)의 외모나 역할을 서로 모방하라는 것이 아니고, 서로 다른 상대방을 감사하고 존중히 여기며 품위를 지켜줌으로써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보전케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남자는 남자로 창조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어야 하고, 여자는 여자로 창조된 것을 감사할 때 자기의 옷을 입는 것을 영광으로 알고 행복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신 22:5에서는 성(性)이 다른 이의 옷을 입는 것은 하나님께 가증한 행위라고 단정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 같은 행위로 동성연애를 합법화시키거나 성(性)을 오용할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생식을 주도하는 신을 섬기는 이방인들이 제사하는 시간에 여자는 남복을 입고 남자는 여복을 입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와 같은 우상숭배의 풍습을 따르지 않게 하려는 의도에서 이와 같은 법규를 주셨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사람들의 전통의상인 킬트(Kilt)같은 여성의 스커트 같은 옷을 금한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남성들은 여성들의 느슨한 치마와 같은 옷을 입는 일을 아주 싫어합니다. 남성과 여성의 스타일과 제단은 아주 다른 것입니다. 남성과 여성의 스타일의 범위는 세월이 지나면 바뀔 수 있기 때문에 특별히 규정 짓기란 매우 애매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이같이 하는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자이니라’고까지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모세의 법 중 특별한 법은 단순한 의식적인 것으로 분류할 수 있거나 또는 신약의 성도들은 구약의 법조항에서 해방을 받은 것인지 문제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적당한 의복과 아담한 옷차림은 신약에서도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 증거의 삶을 살기 위하여 중요하다고 바울은 딤전 2:9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헌신된 신자는 자신보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옷을 입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자가 남자의 의복을, 남자가 여자의 의복을 입는 것은 남녀를 다르게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어기는 것이고, 나아가 동성연애와 같은 성도덕의 문란을 가져올 수 있는 개연성이 많으므로 이를 금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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