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단은, 죄와 심판에 대한 외침을 결코 중단해선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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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단은, 죄와 심판에 대한 외침을 결코 중단해선 안 돼
  • 유선명 교수
  • 승인 2022.05.31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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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명 교수의 예언서 해설 - “여호와여 너무 분노하지 마시오며 죄악을 영원히 기억하지 마시옵소서” (사 64:9)

주 같으신 이가 어디 있습니까! 유일무이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면 당연히 하게 될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 능력과 위엄이 모두 그렇습니다. 몸둘 바를 모를만치 큰 사랑을 입은 사람, 상상 못할 기적을 경험한 사람만이 아닙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을 만나 뵌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에돔에서 오는 이 누구며 붉은 옷을 입고 보스라에서 오는 이 누구냐 그의 화려한 의복 큰 능력으로 걷는 이가 누구냐 그는 나이니 공의를 말하는 이요 구원하는 능력을 가진 이니라... 내가 노함으로 말미암아 무리를 밟았고 분함으로 말미암아 짓밟았으므로 그들의 선혈이 내 옷에 튀어 내 의복을 다 더럽혔음이니”(사 63:1~4) 공포영화가 아닙니다.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범 이야기가 아닙니다. “공의를 말하는 이, 구원하는 능력을 가진 이”라고 스스로를 알리면서 사람들을 짓밟아 터뜨리고, 그 피웅덩이 속을 걸었더니 옷이 더러워졌다고 말하는 그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해서는 안 되는 일 하나는, 성경을 선택적으로 믿고 하나님을 내 맘대로 규정하는 행동입니다. 우리를 자기 눈동자 같이 지키시는 하나님과(신 32:10), 죄를 미워하여 아비의 악행을 자손 삼사대까지 보응하시는 하나님은(출 34:7) 같은 분이십니다. 에스겔 예언자를 통해 “아들은 아버지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할 것이요 아버지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하리니 의인의 공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겔 18:19~20) ”라고 말씀하신 이도 바로 여호와 하나님 그분이십니다. 성경이 어렵다 말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조화시키기 어려운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마치 하나님을 다 아는 양 말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 66권을 물 흐르듯 하나로 꿰어 설명하는 사람은 어딘가에서 성경을 왜곡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성경 스스로가 성경에는 어려운 부분이 있으니 무리하게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억지로 해석하는 이런 사람들을 베드로후서 3:16은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라 부릅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가장 유식하고 견고해 보이는 사람들이어도 예외가 없습니다.

성경말씀은 진리입니다. 한없이 감동적인 구절만이 아니라 때로 거칠고 무서운 구절들도 진리입니다. 신구약 성경에는 분명 진리로서의 통일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무대는 광활하고 그 가르침은 깊고 오묘하기에, 좁디좁은 우리의 이해력으로 담기 어려운 것이 당연합니다. 성경 말씀을 매끄러운 논리로 엮으려하는 대신 주어진 말씀의 명료한 뜻을 받아들이고 합당한 방식으로 반응하는 것으로 족합니다. 포도주 틀에 붉은 포도주가 그득한 풍요로운 그림에서 선혈이 낭자한 심판의 장면을 떠올리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죄의 심판은 분명 하나님의 뜻 안에 있고, 심판의 경고는 성경적 설교의 일부이어야 합니다. 이사야 63장이 펼쳐진 강단에서는 죄의 더러움과 심판의 무서움, 회개의 촉구가 울려 퍼져야 하고, 회중석에서는 두려움에 떠는 영혼의 울림과 고백의 목소리가 들려야 할 것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죄와 심판에 대해 외치기를 중단하고 은혜와 축복의 약속만 난무하는 강단에는 하나님의 복 대신 진노가 임할 것입니다. 자신의 죄와 하나님의 진노를 깨달은 사람이 드릴 기도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여호와여 너무 분노하지 마시오며 죄악을 영원히 기억하지 마시옵소서”(사 64:9)

백석대 교수·구약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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