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창신도시 품고 기도…다음세대로 복음 흘려보내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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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창신도시 품고 기도…다음세대로 복음 흘려보내고파”
  • 이인창 기자
  • 승인 2022.04.05 16: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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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사명선언문] 인천풍성교회 김기재 목사

수원시립합창단원이자 성가대 지휘자로 활동
빚더미 올라앉은 후 하나님 찾아 뒤늦게 신학

고등학교 1학년 여의도광장에서 “목회자나 선교사가 되길 소망하는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 달라”는 목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일어섰다. 아마 1980년 세계복음화대성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인천 풍성교회 김기재 목사는 성령이 역사하는 대로 일어섰지만, 한동안 목회자가 되겠다는 생각은 애써 외면하며 지냈다. 

고등학교 3학년 진학상담을 하면서 담임교사는 그에게 신학을 권유한 적도 있다. 하지만 그는 음악의 길을 택했다. 하나님께서는 음악으로 김 목사의 삶을 이끌어가셨지만, 결국 목회의 길로 돌아오게 하셨다. 역경과 시련 속에서 인천 풍성교회를 개척하게 하셨고, 목양일념으로 평생 목회를 꿈꾸게 하셨다. 

김기재 목사는 고등학교 때 서원했던 목회 사명을 기억하고, 뒤늦게 신학을 공부했다. 역경 속에서도 목회 사명을 부여잡고 지역 복음화를 위해 끝까지 달려가겠다는 각오다.
김기재 목사는 고등학교 때 서원했던 목회 사명을 기억하고, 뒤늦게 신학을 공부했다. 역경 속에서도 목회 사명을 부여잡고 지역 복음화를 위해 끝까지 달려가겠다는 각오다.

마음 한켠에 목사, 진로는 성악가로 
“중학교 1학년 이맘때쯤 친한 친구가 교회를 가자고 해서 처음 교회에 나기가 시작했어요. 교회 선생님이 심방을 오셔서 다시 나가기로 약속을 했기 때문에 빠질 수 없었습니다. 그 이후로는 한 번도 주일을 빠져본 적이 없어요.”

김기재 목사는 집안에서 가장 처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했다. 성실한 성품 때문에 예배와 모임에 빠지지 않았고, 성적도 좋은 편이어서 부모님은 자주 교회에 간다고 잔소리를 조금 할 뿐 크게 나무라지 않았다. 부천 중동신도시가 개발되기 이전, 복사꽃이 만발하던 복숭아밭에 있던 작은 교회였다.  

학창시절, 그는 의사가 되고 싶었다. 당시 담임교사는 그의 신앙을 알아보고 신학을 권유했다. 대답은 나중에 목사가 되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1지망은 의사, 2지망은 한의사를 선택한 후, 3지망에 목사를 희망 직업으로 써내었다. 마음 한 켠에 목사에 대한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고3 어느 날 음악이 그에게 찾아왔다. 목소리가 좋았던 그는 클래식 성악을 전공하고 싶은 꿈이 생겼다. 재수를 각오하고 그렇게 음악공부를 시작했다. 

“가정 형편상 레슨을 받기 어려웠습니다. 감사하게도 교회 4년 선배였는데 지금은 독일에서 음악을 하고 있는 고등부 선생님이 자심감을 북돋아주고, 무료로 레슨을 해주셨어요. 재수 끝에 세종대 음대에 진학해 본격적으로 음악을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뒤늦은 음대 도전은 일단 대성공이었다. 그리고 21살부터 그는 성가대 지휘자로 교회를 섬겼다. 

음악에 빠진 그의 도전은 계속됐다. 1992년 졸업을 앞두고 수원시립합창단에 입단하면서 성악가의 삶을 살게 됐다. ‘로우 베이스’였던 그는 합창단에 한명 밖에 없는 단원장으로 빠르게 올라갔다. 큰 교회에서 지휘자로 활동하면서 안정적인 삶을 살았다. 하지만 뒤돌아보면 그 시기는 폭풍전야와 같았다. 

마흔 살에 시작한 목회의 길
“언젠가부터 성가대 지휘는 하나님을 향한 것이 아니라 생계수단이 되어 있었죠. 합창단 월급을 받으면서 지휘자 사례는 그저 부수입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다가 2003년 경, 보증을 잘못 서서 집도 잃고 가진 것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제서야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어요. 그 때부터 할 수 있는 것은 기도 뿐이었죠.”

말 그대로 빚잔치가 시작됐다. 채권추심이 들어오고 사람들은 시도 때도 없이 집으로 찾아왔다. 합창단에서 퇴근하면 그는 기도원으로 향했다. 기도원 집회를 마치면 다시 교회 기도방으로 찾아들었다. 일 년 동안 그런 일상이 계속됐다. 

“그 때 하나님과 했던 약속이 생각났습니다. 마흔 살이었는데, 고등학교 때 했던 그 약속을 이제는 지켜야 한다고 결심했어요. 주변 목사님들이 추천해 주시고 야간에도 공부할 수 있어서 방배동 신학교에 진학하게 됐습니다. 낮에는 합창단, 밤에는 공부, 새벽에는 전도사로 시무하면서 교회 차량운행을 했습니다.”

밤낮 없는 생활에 과로로 쓰러지기까지 했다. 육체적으로 힘든 시간이었지만 훈련과 연단의 시간이었다. 신대원 졸업과 동시에 합창단을 퇴사한 그는 전임 사역자의 길을 걷게 됐고 3년 간 부목사로 사역한 후 6개월 준비 끝에 인천 주안동에 교회를 개척했다. 연고라곤 하나도 없는 곳으로 하나님께서 보내셨다. 

“목회는 우리 사명이잖아요”
두 딸까지 가족 4명이서 풍성교회를 개척했다. 개척 후 3년 동안은 말할 수 없는 고생이 뒤따랐다. 상가를 임차해 일부는 예배당으로, 다른 일부는 임시로 방을 만들어 전기 패널을 깔아 생활했다. 겨울에는 바닥은 뜨듯한 기운이 있지만 그 위는 입김이 날 정도로 추웠다. 씻는 것도 힘들었다. 자녀들이 동상에 걸린 적도 있었다. 김 목사는 한창 예민한 청소년기에 개척교회 목사인 아버지로 인해 어려운 환경에서 생활하면서도 불평 하나 없이 바른 신앙과 인성으로 커준 두 딸이 고맙기만 하다.

“교인 없이 3년 동안 버틴 것이 은혜죠. 이 길이 아닌가 싶어 목회를 그만두려고 하면 다시 열심히 하라는 사인을 주시듯 돕는 분들을 보내주셨습니다. 매일 같이 초등학교 앞으로 가서 전도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이들이 50명이 넘게 나오면서 교회학교가 부흥되기 시작했습니다.”

목회가 힘들 때마다 동인천노회 선배 목사들이 그에게 엄청난 우군이 되어주었다. 늘 긍정적으로 자기 역할을 다하려는 김 목사를 좋게 보았고 선배들은 필요를 미리 채워주며 그의 목회를 응원했다. 교회학교가 점점 성장해가면서, 토요일마다 떡볶이 잔치를 열었다. 학원강사를 했던 사모는 형편이 어려워 학원을 다니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 학습과 돌봄을 도맡았다. 아이들이 성장하고 차츰 교회도 안정되어갈 즈음, 풍성교회는 인천서창신도시로 이전하게 됐다. 2019년 11월부터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고, 교인들이 찾아오기 시작하는데 코로나가 터졌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올스톱이었다. 

“방역이 완화됐지만 지금까지 여파가 있습니다. 아마 저 같은 목사님들이 많을 겁니다. 그러나 희망을 찾아야지 어쩌겠습니까. 우리 사명이잖아요. 하루하루 강단에서 설교할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할 뿐입니다. 하나님이 그만하라고 하실 때까지 강단을 지킬 겁니다.”

김기재 목사는 풍성교회 주보에 서창지역 지도를 넣고 5만명 주민을 위해 중보 기도하고 있다. 예수 복음을 전하는 교회의 비전과 사명을 꼭 부여잡고 말이다. 다음세대를 살리는 목회에 중심을 두고 있는 김 목사는 코로나가 안정되면 학교 앞으로 달려갈 것이다. 그렇게 다시 사명을 안고 복음을 다음세대들에게 흘려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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