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촌에서 만나는 대한민국, 중심에는 교회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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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촌에서 만나는 대한민국, 중심에는 교회가 있었다
  • 손동준 기자
  • 승인 2022.03.25 11: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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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 역사산책 저자 최석호 교수와 떠난 '남촌' 탐방
강우규 이회영 등 독립 운동가들에 동기부여 한 '신앙'
길에서 찾은 역사 책으로…경주・강릉 등 이야기 '풍성'
최석호 교수와 함께한 '남촌' 탐방의 출발지점은 서울역 광장에 자리한 강우규 동상이다.
최석호 교수와 함께한 '남촌' 탐방의 출발지점은 서울역 광장에 자리한 강우규 동상이다.

대한민국이라는 열매를 맺기까지, 우리의 선배들은 혹독한 겨울을 견뎌냈다. 인고의 시간 한복판에는 민족을 위로했던 한국교회가 있었다. 골목길을 따라가며 우리땅 구석구석의 숨겨진 이야기를 발굴하는 최석호 소장(한국레저경영연구소, 전 서울신학대학교 관광경영학과 교수)을 만나 자주독립국가 대한민국을 쟁취하는 데 일획을 그은 한국교회의 역사를 대면했다. 

 

일제가 두려워한 강우규 의사

마침 그를 만난 날은 유난히 추웠던 겨울과 작별인사를 나누는 3월 중순이었다. 눈을 낮추면 갓난 아이같은 뽀얀 계절이 움을 틔우는 모습을 만날 수 있는 따뜻한 봄날 최석호 소장과 남촌을 걸었다. 출발점은 서울역이었다. 그토롤 많이 오갔던 길에서 낯선 동상을 만났다. ‘강우규 의사’ 동상이다. 강우규 의사는 1910년 8월 22일 경술국치를 당하자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북간도 연길에서 한약방을 운영하며 교회를 세운 그는 1917년 북만주 길림성에서 동포마을 신흥동을 개척하고 광동학교를 세워 직접 교장을 맡았다.

3.1만세운동이 일어난 1919년 9월 강 의사는 새로 부임한 사이토 총독에게 폭탄을 투척한다. 암살에는 실패했지만, 총독이 탄 마차에 폭탄 조각이 박혔고, 핵심 인사들이 부상 당했다. 최 소장은 강 의사가 의거하던 날 조선 총독부의 분위기를 이렇게 소개했다.

“그날 저녁 총독부는 불도 켜지 못했습니다. 조선민중들이 습격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웠던 것이죠. 다음날 경성 시내 대부분 상가는 철시했고, 감옥에서는 만세를 불렀습니다. 일제는 강우규 의사를 두려워했습니다. 사형을 집행한 뒤 불어 닥칠 후폭풍은 더 두려웠죠. 때문에 복역중 사망한 자나 사형당한 자에 대한 일제 제사나 추도회를 금지하는 법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일제 판사마저도 처음에는 강 의사를 ‘피고’라고 부르다가 ‘선생님’ 또는 ‘영감님’이라고 불렀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그만큼 강 의사는 의연하셨습니다.”

강 의사는 옥중에서도 매일 성경을 읽고 기도에 힘썼다. 그리고 청년들의 미래를 걱정하고, 독립 의식을 고취하고자 했다. 그는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그에게는 1962년 건국훈장이 추서됐다.  

“내가 죽는다고 조금도 어쩌지 말라.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아무 것도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다. 내가 자나 깨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다.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

 

우당 선생의 집터.
우당 선생의 집터.

우당 이회영

강우규 의사 동상 앞에서 서울로 7017에 올라 걷다가 남산성곽을 따라 남산에 올랐다. 여기에서부터 안중근의사기념관, 기억의 터, 우당기념관, 남산골한옥마을, 커피한약방 등으로 이어지는 ‘대한민국길’이다. 시계를 과거로 돌리면, 이곳은 조선신사, 통감관저, 국가안전기획부, 친일매국노가옥 그리고 혜민서였다. 남촌은 조선에서 일제강점기를 거쳐 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골목길이다.

그 골목의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준 것이 교회였다.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대부흥운동이 크게 일어난 그 해에 한양 상동교회에서는 민족운동이 크게 일어났다. 우당 이회영 선생은 남대문 상동교회에 입교하고 세례를 받는다. 상동교회 부설 상동청년학원 학감을 맡아서 청년교육에 심혈을 기울인다. 또한 우당 선생은 상동교회에서 헤이그만국평화회의에 특사 파견을 진행한다.

우당 이회영 선생은 고종의 침전 내인 김 상궁과 은밀히 통한다. 김 상궁은 전덕기 목사의 처이종자매다. 드디어 고종은 헐버트 선교사에게 신임장을 내려준다. 헐버트는 우당 이회영 선생에게 전달한다. 우당은 남촌 재동 옆집에 살고 있는 친구 이상설에게 전달한다. 이상설은 이준 열사와 함께 헤이그로 향한다. 뿐만 아니다. 우당은 전덕기(목사)·안창호·이동휘·이동녕·양기탁·이감·유동열 등과 함께 발기인이 되어 신민회를 설립한다. 국권을 회복하고 근대적 공화정을 실현한 자주독립국가를 수립하고자 한 비밀결사다. 1910년 우당은 다섯 형제 일가족과 함께 모든 재산을 팔아 모은 돈 40만원(600억원)을 들고 서간도 유하현 삼원보로 망명한다.

그는 1911년 신흥무관학교를 세워서 독립군을 양성한다. 신흥은 신민회(新民會)가 흥왕(興旺)한다는 뜻이다.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졸업생들은 1920년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 주역이 된다.

우당과 함께 신민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던 이동휘 선생은 일대를 돌면서 순회강연을 한다. 가는 곳마다 교회와 학교가 섰다. 순회 강연 중 침식은 강우규 의사 집에서 했다. 이처럼 남촌은 자주독립국가 대한민국으로 가는 길이다. 그 길은 교회에서 시작해서 대한민국이라는 열매를 맺은 길이다.

역사를 만나는 시간여행

남촌을 비롯해 골목길에 숨겨진 한국의 역사를 들여다 볼 수 있는 풍성한 이야기가 ‘골목길 역사산책_한국사편’(가디언, 최석호 저)에 오롯이 담겼다. 남촌에서 대한민국을 산책했다면, 경주에서 신라를, 강릉에서 조선의 향내를 맡는다. 전남 화순의 사찰 운주사에서는 고려의 흔적을 추적한다. 

먼저 최 소장은 신라사람을 찾아서 경북 경주 골목길을 걸었다. 왕망이 전한을 무너뜨리고 신나라를 세웠다. 그러나 오래 가지 못했다. 왕망과 함께 했던 김일제 후손들은 오랜 시간동안 멀고 먼 망명길을 걸어온다. 사라(斯羅)에 이르러서 다시 오랜 시간을 보낸 뒤 드디어 마립간에 오른다. 덕업을 날로 새롭게 하여 사방을 망라하고자 국호를 신라(新羅)로 바꾼다. 

삼국 중에서 가장 뒤쳐져 있었던 신라는 꾸준히 갈고 닦는다. 고구려로 간다. 목숨을 잃을뻔 했다. 일본으로 간다. 오랜 숙적과 대화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중국으로 간다. 앞선 문물을 받아들였다. 알타이 고산지대에서 스키타이 문화를 수입한다. 흑해 건너 그리스와 만난다. 마침내 백제와 고구려를 무릎 꿇린다. 22번째 전투에서 최후 승리를 거머쥐고 당나라를 쫓아낸다. 최 소장은 “경주 골목길에서 우리는 위기에 강한 한국사람이 된다”고 소개했다.   

시간여행의 다음 행선지는 고구려다. 하늘 한 가운데에 북극3성 태일이 있다. 뭇별들은 태일을 중심으로 돈다. 고구려가 본 하늘이다.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고려는 다섯 곳에 태일전을 세운다. 태일5궁 중 간방 곧 남서쪽 화순에 태일전 운주사를 세운다. 화순이 속한 능주 권역은 황후 공예태후를 배출한 지역이다. 공예태후가 낳은 다섯 아들 중 세 명이 황위에 올랐으니 화순보다 태일전을 짓기 좋은 곳도 없다. 태일 다음 가는 남쪽 하늘신 운중군에게 초례(도교제사)를 지내기 위해 초성처를 조성한다. 운주사다. 보통 우리가 아는 사찰에 ‘불국’, ‘해인’, ‘통도’, ‘범어’ 등 불교 교리와 관련한 이름이 붙은 반면 운주사에는 불교와 아무 관련이 없는 이름이 붙은 까닭이다.

끝으로 최 소장은 강원도 강릉  골목길에서 조선사람이 누구인지를 찾았다. 강릉사람 안동권씨는 남편 효령대군 10세손 이주화가 죽자 삼년상을 치른다. 두 아들을 데리고 고향 강릉으로 돌아와서 염전을 일군다. 아들 이내번은 농지를 개간한다. 염전과 농지를 경영하면서 번 돈으로 배다리골에 집을 짓는다. 선교장이다. 좌우에 오죽헌과 초당을 끼고 있다. 선교장은 왕실 후손 집, 오죽헌 서인 영수 율곡의 집, 초당은 동인 영수 허엽이 가꾼 집이다. 한양에서는 궁궐을 중심으로 좌우에 서인과 동인이 살았다. 강릉에서는 선교장을 중심으로 좌우에 서인 영수와 동인 영수가 살았다. 그야말로 작은 한양이다. 

최 소장은 이번 책을 시작으로 우리역사를 새롭게 조명해 나갈 계획이다. 한 사람이 걸어 간 길이 인생이라면, 역사는 한 민족이 걸어간 길이다. 한민족이 걸어간 골목길에서 가야·마한·고려 등 우리역사 이야기가 후속편으로 나올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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