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로 세워진 이주민은 세계선교의 주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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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로 세워진 이주민은 세계선교의 주역입니다”
  • 한현구 기자
  • 승인 2022.03.16 13: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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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민 선교의 개척자 씨앗선교회 허은열 목사

해외여행을 가지 못하는 답답한 나날이 이어지고 있다. 그로 인해 선교사마저 제대로 파송이 이뤄지지 못하고 기존 사역자들도 국내로 귀국하고 있는 현실이다. 하지만 물길이 막히면 새로운 길이 열리는 법. 선교계는 한국에 있는 타문화권 이주민 250만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최근 들어서야 코로나 사태를 극복할 선교 전략으로 이목이 집중된 이주민 선교를 17년 전부터 시작한 개척자가 있다. 국제 이주민 씨앗센터와 씨앗선교회를 통해 이주민들을 섬기는 허은열 목사가 그 주인공. 지난 11일 인천 호구포 씨앗센터를 찾아 예장 백석총회 국내 이주민 선교사 1호로 파송받은 그를 만났다.

이때를 위함이라

처음부터 선교사는 아니었다. 하지만 외국 문화에는 익숙했다. 청년 시절부터 의류 회사에 다니며 외국에서 일했던 덕택이다. 주로 이슬람 문화권인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이라크 등 중동이 대부분이었다. 덕분에 당시 한국인들에겐 동화 속 세상이나 다름없었던 이슬람 문화에 빠르게 익숙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외국인과 자주 만난다고 선교의 꿈이 샘솟을 수는 없는 일. 허은열 목사가 선교의 부르심을 받은 것은 한국에 귀국해 결혼하고 난 이후였다. 결혼 후 아내가 소속돼있던 제자선교회(DCF)에서 양육 받고 훈련받았다. 점차 신앙이 자라며 신학교도 다니면서 전도사로 사역했다.

이주민들을 만난 것도 그때부터였습니다. 전도사로 제자훈련을 맡았던 청년들과 함께 후에 인도 선교사로 떠난 이정태 선교사를 찾았죠. 그곳은 다름 아닌 이주민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던 컨테이너 박스였어요. 하지만 그때만 해도 청년들과 함께 이곳을 섬기는 봉사자라고 여겼지 이 사역이 제 사역이 될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정태 선교사가 인도로 떠나기로 결심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이 선교사는 허 목사에게 이 사역을 이어가달라고 부탁했다. 처음엔 웃어 넘겼지만 사역자가 기도도 안 해보고 결정할 순 없다는 생각에 한 달의 무릎을 꿇었다.

하나님의 응답은 뜻밖이었다. 청년의 때 이슬람 국가에서 일했던 것이 지금 이 사역을 위한 훈련이었다는 응답. 기도 이후 컨테이너를 보니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이주민들이 모여 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모두 이슬람 국가에서 온 이들이었다. ‘저 친구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그동안 이슬람 문화를 경험하게 하셨구나하는 생각이 스쳤다.

원래 아내는 신학을 하는 것도, 안수를 받는 것도 반대했었습니다. 그런데 기도 응답으로 소명을 받고 나니 아내에게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었죠.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는데 아내의 대답은 놀라웠습니다. 이주민을 섬기는 사역이라면 자신이 돕겠다고 하더군요. 그 이후로 아내는 지금까지도 매주 토요일마다 이주민들을 위해 식사를 대접하고 있습니다.”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

이 선교사가 떠나고 본격적인 이주민 사역이 시작됐다. 콘테이너에는 우즈벡 이주민이 50여 명. 인도, 몽골, 베트남, 동남아에서 온 이들도 있었다. 주일이면 허은열 목사가 대예배에서 한국어로 말씀을 전하고 이후 나라별 언어별 예배로 흩어졌다.

평소엔 이주민들의 생활권 안으로 파고들었다. 무슬림들은 움마(Umma)라고 하는 그들만의 공동체를 소중히 여긴다. 허 목사는 그들의 파티나 모임에 참석하며 함께 음식을 나누고 친구가 됐다. 이슬람 문화권에서 일했던 경험이 이때 빛을 발했다.

당시엔 국내 이주민 선교를 제대로 연구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사역을 하면서 더 잘하기 위해 공부를 하고 학위를 받았는데 이주민 선교 전문가가 많지 않다보니 이곳저곳에서 대학교 강단에 서게 됐죠. 제가 하고 싶어서 한 일이라기보다 모두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순종한 결과입니다.”

잘 되는 줄로만 알았던 이주민 사역에도 위기가 찾아왔다. 한 번은 대부분 불법체류자인 이주민 노동자들이 집중 단속으로 인해 줄줄이 잡혀 들어가는 일이 있었다. 씨앗선교회 이주민 공동체를 구성하던 이들도 상당수 본국으로 송환돼야 했다. 북적거렸던 이들이 떠난 빈자리는 허전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본국으로 송환된 이들을 방문하기 위해 우즈벡 현지를 찾았습니다. 3주 동안 머물며 우리 공동체에서 함께 하던 형제자매들을 만났는데 충격적이었어요. 한국에서는 사도신겨도 줄줄 외우고 새벽에 전화로 기도를 부탁하던 이들이었는데 고향에 가니 도로 무슬림이 되어 있었어요. 허무하고 절망적이었죠. 하나님께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고, 이 사역을 그만두겠다고 토로했습니다.”

하지만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자 보이지 않던 것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허 목사가 방문했을 당시는 라마단 기간이었는데 한국에서 선교회에 나왔던 이들은 매일 있는 꾸란 읽는 모임에 참석하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일정의 막바지 말씀을 전하기 위해 찾은 고려인교회에 차로 데려다준 형제는 교회 의자에 그대로 남아 끝까지 예배를 드렸다. 그것은 이슬람 국가에 사는 현지인에게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이었다.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은 바울은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고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라는 말씀을 떠오르게 하셨어요. 그곳이 이슬람 국가였기 때문에 신앙을 드러낼 수는 없었지만 한국에서 심겨진 복음의 씨앗이 그들에게 분명히 남아있음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 죄송하다고, 힘을 내서 사역하겠다고 다시 기도를 드렸죠.”

이주민이 세계선교의 주역

이제는 허 목사가 이주민 사역을 시작했던 초창기와는 환경이 많이 달라졌다. 예전에는 무슬림 이주민들이 도움을 받을 곳이 마땅찮아 교회를 찾는 일이 많았고 무슬림 이주민들을 모아 예배를 드리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요즘은 이주민들이 모여 사는 지역엔 모스크와 기도처가 세워지고 이슬람 공동체를 이루며 살기에 예배로 초대하기가 쉽지 않아졌다.

이제는 1:1로 만나서 관계전도를 하는 것을 주요 전략으로 삼고 있습니다. 무슬림 관계 전도에는 시간과 꾸준함, 그리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다리는 마음이 필요해요. 적어도 5년 정도는 만나야 겨우 복음을 소개할 수 있습니다. 원래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무슬림들이 집에 초대해서 삼겹살을 같이 먹자고 할 때가 있어요. 그때가 바로 그들이 제게 마음을 열었다는 신호탄이죠.”

무슬림 이주민 사역을 공동체에서 관계 전도로 전환한 이후 씨앗 센터에는 캄보디아, 베트남 공동체 등이 세워졌다. 공동체 구성원은 대부분 같은 고향에서 온 친족들이 많다. 그렇다보니 현지에 돌아가서도 흩어지지 않고 예배를 드리고 같은 지역 같은 친족이기에 핍박이 덜하다. 이곳에서의 신앙훈련으로 현지에 새로운 신앙공동체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한국에서 이주민 사역을 통해 복음을 접하고 현지로 돌아간 이들은 누구보다 훌륭한 선교사가 됩니다. 언어와 문화가 통하고 유대감도 가지고 있는데다 비자 문제가 터질 일도 없죠. 이주민 사역은 한 영혼을 구원하기도 하지만 그가 속한 고향 공동체 전체에게 복음을 접할 기회를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주민 사역이 선교의 새로운 활로로 주목받고 있는 요즘 허 목사는 귀국 선교사들에게 사역지를 소개해주는 일도 맡고 있다. 허 목사는 교단에서 비교적 빨리 선교사로 인정을 받은 케이스지만 아직도 선교사로 인정받지 못한 국내 이주민 사역자들도 많다. 이주민 사역 활성화를 위해 교단과 단체 차원의 개선이 속히 이뤄졌으면 하는 것이 허 목사의 바람이다.

이주민 사역자들의 소망은 다 똑같을 겁니다. 여기서 훈련받은 사람들이 자국에 돌아가 교회를 세우고 건강한 신앙 공동체를 세우는 그것이죠. 단 한 명이라도 확실한 제자가 세워지면 현지에서 정말 귀한 사역을 감당할 수 있어요. 이 땅에서 복음을 듣고 훈련받은 이주민들이 세계선교의 주역이 됐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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