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게 끝까지 목회자로 남겠습니다”
상태바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게 끝까지 목회자로 남겠습니다”
  • 천안=이인창 기자
  • 승인 2022.03.09 01:0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개척지 찾아 국도 1호선 따라 무작정 떠난 여정
수차례 목회 위기, 하나님께서 예비하셔서 극복

점퍼 차림에 목장갑을 끼고 먼지를 잔뜩 뒤집어 쓴 채 나타난 이주형 목사. 교회 건축을 하느라 한참 분주한 듯 보였다. 공사는 이제 마무리 단계라고 했다. 건물 외관은 어느 정도 깔끔하게 완성되어 있었고, 내부 인테리어만 마치면 되는 것 같았다. 

코로나 와중에 공사를 진행하기 얼마나 어려웠을까. 이 목사는 예산을 절감하기 위해 직영으로 건축을 진행했다고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했다. 하지만 곁에 있던 교인은 목사님에게 이루 말할 수 없이 힘든 일이 많았다고 귀띔했다. 이주형 목사는 부끄럽지 않게 이번에는 온전한 성전을 지어야 한다는 마음에 그야말로 버텼다고 했다. 목회자로 부르신 ‘사명’이 그를 붙들었다고 했다. 

천안 한성교회 이주형 목사는 목회자로 부르신 소명을 끝까지 붙들고 승리하는 목회를 이어왔다. 이제 완공된 새 예배당에서 남은 목회의 시간도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다는 각오다.
천안 한성교회 이주형 목사는 목회자로 부르신 소명을 끝까지 붙들고 승리하는 목회를 이어왔다. 이제 완공된 새 예배당에서 남은 목회의 시간도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다는 각오다.

낮에는 건설현장, 밤에는 신학교
시골에서 처음 교회에 나가긴 했지만 상경해서야 본격적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작은 아버지가 늦깎이 신학생이 되고 개척까지 하면서 조금이라도 돕기 위해 나간 발걸음이었다. 그러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소명이 있었다. 목회자가 되어야겠다는 거부할 수 없는 확신이 있었다. 처음 방배동에서 신학을 공부할 때만 해도 개척 목회를 하겠다는 생각은 아예 없었다. 

개척 후 고생하는 작은 아버지를 본 탓이다. 기관목사나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27살 나이, 현실은 냉혹했다. 동생들 학비도 보내야 하고, 학비도 벌어야 했다. 결국 다니던 출판사를 그만두고, 친구 외삼촌을 따라 건축 현장 잡부로 따라다녔다. 새벽기도를 마치자마자 건설 현장에 나가 깡통에 불 피우는 것부터 갖은 일을 다 했다. 그래도 4시면 퇴근할 수 있어서 야간에는 신학공부를 이어갈 수 있어서 감사했다. 파김치가 돼서 집에 가면 12시, 과제까지 하고 3시간 자면 많이 자는  때였다.  

그러다 신대원 2학년 때부터 교육전도사로 교회 사역을 시작했다. 중고등부를 맡았고, 사례비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정말 열심히 하고 싶었다. 교회 옆 산비탈 작은 연탄방까지 얻어서 살았다. 목사가 되어서는 대형교회에서 교육목사로 청빙을 받아 사역했다. 처음 생각대로 개척 목회가 아니라 기관 목회를 하게 된 셈이다. 

“개척 안하기로 했는데요?”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언젠가부터 로마서 15장 20절 말씀이 기도할 때마다 생각이 났다. 맴도는 말씀 생각에 정작 기도는 나오지 않았다. 부흥회를 할 때도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순종을 요구하는 것을 느꼈다. 주변에서는 개척을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조언이 많았다. 

“‘개척 안하기로 했는데요?’ 하나님께 물었어요. 그 때 내가 허락했냐고 하시는 마음을 주시는 겁니다.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말라’는 말씀은 청빙이 아니라 새로운 곳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뜻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리곤 담임목사님을 찾아가 사임을 말씀드렸죠.”

당시 담임목사는 만류했다. 개척지도 정하지 못했고, 개척 멤버와 개척 자금도 없는 것을 알고 더 준비하라는 배려였다. 그러나 이주형 목사는 고집을 피웠다. 곧 연말이 지나면 시무 교회가 새롭게 출발해야 하는데, 중간에 부목사가 그만둔다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12월 말일 사임을 앞두고 1번 국도를 따라 가며 개척지를 찾기 시작했다. 안양, 수원, 오산, 평택을 거쳐 해질녘 도착한 곳이 천안이었다. 그리고 교회가 없는 곳을 물어물어 두정동을 소개받았다. 

“슈퍼마켓에 들어가 교회 세울 빈 곳이 없냐고 물어봤더니, 동네 사과창고를 알려주었습니다. 아파트를 지을 때 인부 숙소로 쓰던 장소였죠. 손윗 처남과 함께 여기저기 공사를 하고, 일년치 월세를 주고 가족들과 처음 예배를 드렸습니다.”

한성교회의 출발이다. 감사하게도 6개월 만에 세례교인이 20명이 되었고, 이내 교인은 40명으로 부흥했다. 목회가 재미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지역이 개발되면서 일 년도 안 돼 쫓겨나고 말았다. 

“목사는 죽을 때까지 목사입니다”
“비오는 날 이불과 보면대만 가지고 나와야 했습니다. 다행히 임대아파트에서 예배를 이어갔지만 민원 때문에 그마저도 어려워졌습니다. 우리 교인들이 고생이 많았는데 감사하게도 모두가 함께해주었습니다. 그런데요. 하나님은 저보다 앞서 예비해 두신 것이 있었습니다.”

이주형 목사는 땅을 구입하도록 주시는 마음을 받았다. 돈은 물론 없었다. 부동산에 일단 문의했는데, 어느 날 땅 주인이 만나고 싶다며 연락을 해왔다. 

“땅 주인 할아버지가 막 우시는 겁니다. 모든 조건을 다 맞추어주겠다면서요. 결혼 이후 신앙생활을 못하다가 자기 땅에 교회를 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으셨다는 겁니다. 내 땅에 교회가 세워진다는 생각에 감동이 되어서 잠을 한 숨도 못 잤다고 했습니다. 물론 돈은 없었죠. 그런데 순조롭게 은행 대출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시고 사람을 보내주셨습니다.”

건축은 일사천리 추진됐다. 이 목사는 5년 후 재건축하겠다는 생각으로 ACL 벽돌을 주로 이용해 80여평 예배당을 지었다. 이 때도 직접 건축을 진행했다. 그런데 이 목사의 마음 한 켠에는 하나님을 향한 죄송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교회는 또 부흥하고 성장했고 교육관도 잘 지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내가 새 일을 행하리라”는 말씀을 이 목사에게 다시 주셨다. 지금의 자리에 교회를 다시 건축하라는 비전을 주셨다. 주변에서는 만류했다. 목회 후반기 고생길로 접어든다는 조언이었다. 

“목사는 죽을 때까지 목사 아니겠어요? 복음을 전하고 제자 세우는 것이 받은 사명인데,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으려면 목회 밖에 없었습니다.”

준공 허가를 받고난 후 매일이 감사다. 비로소 온전히 교회를 세웠기 때문이다. “저는 끝까지 한성교회에서 사명을 감당하며 1대 목사로 살려고 합니다. 그 다음은 2대 목사가 하면 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