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명 앞에 느끼는 부담과 불안…하나님은 반드시 ‘상급’ 주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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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명 앞에 느끼는 부담과 불안…하나님은 반드시 ‘상급’ 주셔
  • 유선명 교수
  • 승인 2022.03.08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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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명 교수의 예언서 해설 - “나에 대한 판단이 여호와께 있고 나의 보응이 나의 하나님께 있느니라” (사 49:4)

자유를 소중히 여기는 우리 시대에 누군가에게 매인 ‘종’을 자처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공직자가 자신을 공복(public servant)이라 부르며 나라를 위해 충성을 맹세하는 의례는 누구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입니다. 서양에서 정부의 장관과 목사가 똑같이 종 혹은 집사를 가리키는 ‘미니스터’(minister)로 불리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종,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호칭을 명예롭게 여기는 기독교 전통이 그 뿌리에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서에 여러 번 등장하는 ‘여호와의 종’은 참으로 명예로운 호칭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기대를 한몸에 받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태에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 어머니의 복중에서부터 내 이름을 기억하셨으며 내 입을 날카로운 칼 같이 만드시고 나를 그의 손 그늘에 숨기시며 나를 갈고 닦은 화살로 만드사 그의 화살통에 감추시고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나의 종이요 내 영광을 네 속에 나타낼 이스라엘이라 하셨느니라(49:1~2)”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받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지를 실감나게 보여주시는 말씀입니다. 태중에서부터 받은 사명, 하나님이 지어주신 이름, 하나님의 비밀병기, 하나님의 영광을 담은 존재가 이스라엘이요 우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소명감은 자부심과 함께 부담감도 줍니다. 예언자들이 소명을 ‘짐’으로 표현하고 그 짐을 벗어버리고픈 심정을 호소했던 것은 그들이 유약하거나 부실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소명 앞에 진실할수록 높으신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에 낙심하기도 쉽습니다. 충성했어도 성과가 없을 때 자신의 소명을 의심하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여호와의 종 이스라엘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말하기를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하게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다 하였도다(4상)” 맡기신 사명을 빙자해 사익을 채운 못된 종의 푸념이 아닙니다. 진심으로 수고해본 사람이 토로할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수고했는데. 이만하면 최선을 다했는데. 하나님이 아실텐데… 그렇게 흐느껴본 사람은 압니다. 그 자리가 얼마나 어둡고 고독한 자리인지를.

이역만리 선교지에 남편과 아내, 자식을 묻고 하나님 앞에 섰던 종들의 심정을, 아들들을 죽인 원수들을 용서하고 양자로 받아들인 분의 마음을, 억울한 비난에 맞서지 않고 눈물을 삼키며 주의 몸된 교회의 화평을 지켜낸 분들의 호소를, 자신의 건강도 식구의 호강도 뒷전으로 주의 일에 헌신했는데 보이는 열매가 초라할 때 가슴을 조여오는 답답함을 말입니다.

하나님의 종이 고백합니다. “참으로 나에 대한 판단이 여호와께 있고 나의 보응이 나의 하나님께 있느니라!(4하)” 사람의 인정이나 자신의 납득이 아닌 하나님의 판단으로 눈을 돌리는 이 변화가 놀랍습니다. “헛수고였구나”에서 “하나님께서 판단하시고 보응하시지”로의 노정. 결심하면 그냥 가지는 길이 아닙니다. “기도할게요. 하나님이 상을 주실 거야. 더 고생한 분들도 많은데. 좋은 것만 생각하세요…” 바람 소리밖에 되지 못하는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를 위로하고 회복시켜주십니다.

악인의 형통을 보며 낙심하고 믿음을 잃을 뻔했던 아삽의 고백을 우리 것으로 삼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시 73:24~25)”

백석대 교수·구약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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