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나팔수로서 다시 전도의 불 일으킬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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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나팔수로서 다시 전도의 불 일으킬 것”
  • 이인창 기자
  • 승인 2022.02.09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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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사명선언문] 희락교회 김만택 목사 / 인천노회 노회장

죽기로 결심했을 때 환상으로 만나주신 하나님
“말씀으로 양육해야만 성도들의 신앙 견고해져”
희락교회 김만택 목사는 특별한 가운데 주님을 만났지만, 말씀 안에서 견고한 신앙을 강조하고 있다. 성경 중심의 양육, 성도들을 향한 섬김의 비전으로 희락교회 목회를 이루어가고 있다.
희락교회 김만택 목사는 특별한 가운데 주님을 만났지만, 말씀 안에서 견고한 신앙을 강조하고 있다. 성경 중심의 양육, 성도들을 향한 섬김의 비전으로 희락교회 목회를 이루어가고 있다.

“죽을 때 죽더라도 천국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초등학교 때 친구 전도로 교회에 가본 적이 있는데,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고 했던 말이 기억났습니다. 죽더라도 교회에 한 번 가보자고 생각했습니다.”

희락교회 김만택 목사는 중학교에 가지 못하고 상경해 직공생활을 했다. 4남 3녀 중 막내였지만 공부를 시키지 못할 정도로 힘겨운 시절이었다. 18살, 뒤늦게 찾아온 사춘기였는지 암담한 미래 앞에 죽기로 결심했다. 배움은 짧고 주변과 겪는 갈등 때문에 무기력해져 약국을 다니며 수면제 38알을 모았다. 죽음 앞에서 막연히 떠오른 ‘교회, 예수님, 천국’은 그의 발걸음을 자연스럽게 예배당으로 이끌었다.

“교회에 출석한 지 한 달이나 됐을까요. 평일인데도 기도하러 가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겁니다. 남한산성 근처 교회를 찾아가 기도를 하는데 그렇게 눈물이 나더군요. 기도하는 과정에서 주님을 만나는 환상을 보게 되었고, 아무 것도 모르는데 방언까지 받았습니다.”

주님을 만난 첫사랑은 뜨거웠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길을 가다가도 버스 안에서도 전도하고 싶은 마음이 불같이 일었다. 봉제공장을 다닐 때, 한 시간 일찍 출근해 공장마다 다니며 미싱사들에게 전도를 했다. 노조를 결성한다는 오해를 받아 부당해고까지 당했지만 열정은 쉽게 삭아들지 않았다.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싶은 그런 시기였습니다. 내가 깨달았던 복음을 증거하지 않을 수 없었고, 가만히 있는 것을 견딜 수 없는 때였죠. 예수 믿고 미쳤다는 소문이 고향까지 퍼졌으니까요.”

그는 총 20가지 넘는 직업을 전전했다. 안 해 본 일이 없을 정도다. 중국집 배달, 이발소 직원, 선반공장 노동자, 구두닦이, 나이트클럽 주방보조까지 고생의 연속이었다. 그토록 힘겨운 시간에도 예수를 만난 감격은 실로 엄청났다. 

다시 한 번 하나님, 신학의 길로
김만택 목사는 늘 공부에 목말랐다. 빌라 방 한 칸 얻을 전세금으로 어렵게 신혼생활을 시작한 후에야 그는 검정고시로 중학교 과정, 고등학교 과정을 마쳤다. 낮에는 직장을 다니고 밤에는 학원을 다니며 힘들지만 공부에 온 열정을 쏟았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의 신앙 열정은 차갑게 식어있었다. 인천으로 이주해 결혼생활을 하고 두 자녀가 태어났지만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20대 때 혼자 떠돌면서 신앙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의 20대는 낮에는 방위로, 밤에는 룸살롱 연주자로 하루하루를 버티던 시기였다. 

“다시 교회에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항상 마음속에는 은혜를 체험했던 그 때가 있었거든요. 1988년 새해 첫 주 아내에게 교회에 나가겠다고 선포를 하고 온 가족이 출석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내 입장에서는 황당했을 겁니다.”

그런데 교회에 나가자 기도를 많이 하는 주변 성도들이 공통적으로 그에게 신학을 해야 할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1980년대 후반은 기도원 열풍이 불던 때였다. 그야말로 기도의 용사들이 말을 맞춘 듯이 그에게 신학을 권했다. 이제 겨우 직장생활이 안정을 찾고 가정을 꾸리고 살 만하게 되었는데…. 그는 정말 피하고 싶었다. 

“신학을 하게 하시려면 집사님 권사님이 아니라 직접 응답해 주셔야 하는 것 아니냐고 애써 핑계를 댔지요. 야간근무를 마치고 어느 날 옥상에서 기도를 하는데 18살 때 보았던 환상을 다시 보여주시고 해석을 해주셨습니다. 아주 간단한 논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음을 증거 하는 나팔수로 저를 사용하겠다는 것이었어요. 확신을 갖고 담임목사님 추천을 따라 방배동에서 신학공부를 하게 됐지요.”

막상 신학을 공부하니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어야 할 것 같았다. 제법 규모가 있는 안정적 회사를 다니고 있었고, 회사 대표도 야간에 학교를 다닐 수 있도록 배려해주던 곳이다. 퇴직금으로 금은방을 시작한 아내는 3개월 만에 그만두었다. 신학을 공부하자니 먹고사는 것부터 걱정이었다. 

개척교회를 위해 종탑 헌물을 약정했는데, 무작정 종탑 회사에 일자리가 없는지 물었다. 다행히 그 계기로 김 목사는 교회 종탑을 설치하는 일을 하면서 신학공부를 마칠 수 있었다. 

성도들을 위한 ‘시니어센터’ 소명
김만택 목사는 교회 종탑 일을 하면서, 약 10년 동안 사례비를 받지 않고 부교역자로 시무했다. 자비량 목회를 했던 셈이다. 이제는 개척 목회를 해야 할 때다 싶을 때, 부교역자로 시무하던 교회에서 담임 목회를 할 수 있게 됐다. 현재 시무하고 있는 희락교회다. 성도들에게 그의 청빙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김 목사는 목회 사역 중에서 전도와 양육을 우선순위로 꼽는다. 특히 성경공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성도들은 꼭 성경 말씀을 통해서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말씀 가운데 양육될 때 어려운 문제가 생기더라도 이겨낼 수 있는 견고한 신앙을 갖게 되니까요. 은사는 확신을 갖게 하지만 삶을 바꾸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말씀은 삶을 변화시킵니다.”

말씀 중심의 목회는 희락교회를 안정되게 이끌었다. 성도들은 목회자의 판단을 늘 믿고 존중해 주었다. 김 목사는 열심히 전도하고 말씀 중심으로 살고자 애쓰는 성도들을 볼 때마다 고마운 마음이 든다고 했다. 

배움에 목말랐던 김 목사는 방송통신대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백석대 사회복지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에게는 교회가 감당해야 할 ‘시니어센터’ 소명이 있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평생을 헌신한 분들이 혹시 노년에 오갈 데가 없다면 교회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대상자가 없지만 언제든 모셔올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김 목사는 인천노회 노회장으로 섬기고 있다. 노회 소속 98개 교회와 함께 코로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며, 서로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다. 

“우리 노회 목사님들은 노회에 대한 긍지와 사랑이 큽니다. 노회장 역할을 잘 해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셔서 감사한 마음입니다. 우리가 코로나 때문에 그냥 주저앉을 수는 없잖아요. 우리 교회뿐 아니라 인천노회 소속 모든 교회가 다시 전도의 불을 붙일 것입니다. 코로나를 핑계로 움츠러들지 말고 본질에 충실하도록 나아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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