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계명을 어기는 죄악, 모두 탐심으로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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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계명을 어기는 죄악, 모두 탐심으로 비롯된다
  • 한현구 기자
  • 승인 2021.12.06 14: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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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하는 십계명, 다시 쓰는 신앙행전 (38) 모든 죄악의 뿌리, 탐심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20:17)

비교하지 않고 살면 얼마나 편할까.” 주말에 만난 친구가 말을 걸어왔다. 이야기인즉 이랬다. 대학 동기에게 청첩장을 받고 그동안 바쁜 삶에 자주 보지 못했던 친구들을 오랜만에 만날 수 있었단다. 그런데 반가운 마음 뒤편에 무언가 씁쓸한 기분을 숨길 수 없었다. 넉넉하지 못했던 집안 사정으로 쫓기듯 취업전선에 뛰어든 자신에 비해 여유롭게 준비 기간을 가진 친구들의 배경은 너무도 빛나보였다.

사실 우울한 마음의 치료제는 명확하다. 친구의 말마따나 다른 이들과 자신을 비교하지 않으면 된다. 그런데 그 교과서적인 정답을 실천하기란 참 말처럼 쉽지 않다. 더 많이 갖고자 하는 탐욕은 우리 마음의 뿌리에서 잡초처럼 올라와 작은 균열을 파고든다.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는 열 번째 계명을 우리는 어떻게 지키며 살 수 있을까.

 

죄를 잉태하는 탐심

십계명의 대미를 장식하는 열 번째 계명은 다른 계명과 다른 특징이 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는 말씀들은 모두 우리의 행동과 연결된다. 하지만 10계명인 탐내지 말라는 말씀은 우리의 마음을 향하고 있다.

그래서 탐심은 다른 계명들을 어기게 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성에 대한 욕심으로 간음을 범하고, 재산과 명예에 대한 욕심으로 도둑질과 살인, 거짓말을 저지른다. “탐심은 곧 우상숭배”(3:5)라는 말씀처럼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명한 1계명부터 4계명도 탐욕과 무관하지 않다. 다르게 보면 탐심을 제어하는 것이 곧 다른 계명들을 지킬 수 있는 길이 된다는 얘기도 된다.

날마다 기막힌 새벽의 김동호 목사는 우리가 불행한 이유는 사실 가난이 아니라 죄 때문이다. 죄가 병이라면 원인을 알아야 치료할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죄의 원인도 우리에게 말씀해주신다. 성경은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는다고 말한다. 이는 곧 탐심이 죄의 원인인 동시에 불행의 원인이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 마음에 싹트는 탐심을 이겨낼 수 있을까. 의외로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말씀에서 그 길을 발견할 수 있다. 김동호 목사는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천하보다 크고 귀한 존재로 지으셨다. 원래 작은 것은 큰 것을 다 채울 수 없는 법이다. 그 말은 곧 천하에 존재하는 어떤 재물로도 그보다 큰 우리를 채울 수 없다는 뜻이라면서 돈과 세상으로 우리를 만족시키려는 것은 헛되고 불가능하다. 그것을 깨닫는 것이 10계명의 출발점이라고 지적했다.

 

무소유가 정답일까

탐심이 문제라고 하니 욕망과 소유를 모두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생겼다. 이는 흔히 금욕주의나 무소유라는 방식으로 표현된다. 과연 금욕주의를 지키며 무소유를 실천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10계명을 통해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일까.

앙드레 지드의 소설 좁은 문의 주인공 알리사는 제롬을 사랑하면서도 그 마음을 꼭꼭 눌러 숨긴다. 이유는 다름 아닌 철저한 금욕주의 때문이다. 끝내 집을 나가 아무도 모르게 죽음을 맞는 삶을 택하는 그녀의 모습은, 금욕이 사실 욕망을 금하는 것이 아니라 금함을 욕망하는 것이라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성경은 탐심에 대해서는 분명히 경고 하지만 그렇다고 무소유를 권장하거나 훌륭한 태도로 가르치지는 않는다. 사실 소유에서 행복을 찾는 것과 무소유에서 행복을 찾는 것은 전혀 달라 보이지만 공통점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소유의 유무에 행복이 달려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김동호 목사는 소유에는 그만한 가치가 없다. 많든 적든 우리를 행복하거나 행복하지 않게 만들지 않는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무조건 가난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고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안다고 한 것이다. 그는 소유에서 벗어난 사람이었다면서 우리는 팔복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세상에 대해서는 심령이 가난하되 의에 대해서는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필요와 탐심을 구분하기

넘치는 탐욕도, 그렇다고 무소유도 아닌 균형을 찾는 것이 우리의 과제다. 그것은 곧 우리에게 반드시 있어야 하는 필요에 대한 욕구와 죄에서 비롯된 탐심을 구분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장동민 교수(백석대)는 필요와 탐심을 구분하기 위한 기준을 네 가지로 정리해 제시했다.

첫째는 하나님의 원칙에 맞는지 질문하는 것이다. 성욕을 부부관계 내에서 사용하면 하나님의 선물이 되지만 부부관계를 벗어나면 계명을 어기는 간음이 된다. 둘째로 그 욕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는지, 혹은 멀어지게 하는지를 질문해야 한다. 욕망의 지배를 받아 하나님을 잊는 순간 그것은 분명 필요를 넘어선 탐욕이 된다.

셋째로 그것이 없어졌을 때 고통 받지 않을 수 있는지, 혹은 여유가 생겼을 때 남용하지 않을 수 있는지 점검해보는 것이 좋다. 장 교수는 만약 가진 것이 사라졌을 때 서운한 마음과 고통이 너무 오랫동안 지속되고 상처가 된다면 그것은 탐욕을 부렸던 것임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마지막으로 내가 요구하는 그것이 이웃에게 해를 끼치거나 사회를 불의하게 만드는지 살피는 일이 필요하다. 옷을 잘 입어서 깨끗하고 아름답게 살아가는 것은 사람을 기분 좋게 하지만 사치로 곁에 있는 사람을 주눅들게 한다면 욕심이 될 수 있다.

장 교수는 이 구분법은 종교개혁자 칼빈이 먼저 제시했다. 하지만 모두 객관적인 평가 기준이 아니라 주관적인 기준이다. 탐욕에 관련된 문제를 모두 해결해주지는 못한다면서 그래도 하나님이 들려주시는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끝없이 질문하고 고민할 때 우리 삶에서 필요와 탐심의 경계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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