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세상에서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만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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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세상에서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만행
  • 이상규 교수
  • 승인 2021.11.24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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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교수의 초기 기독교 산책 - 초기 기독교의 전쟁과 평화에 대한 이해(1)

‘평화’(平和, peace)는 우리 사회의 중요한 화두가 되고 있다. 6.25 전쟁의 발발과 재난, 그 이후 전개된 남북 간의 군사적 대결, 특히 북한의 거듭된 핵실험을 보면서 평화, 혹은 평화로운 공존은 우리의 이상이 되었다. 그래서 1980년대 이후 우리 사회에서 평화, 평화공존 혹은 평화통일에 대한 관심이 보다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긴장완화와 평화통일에 대한 논의가 일기 시작했고, 기독교권에서도 평화를 주제로 하는 여러 논저들이 소개되고 출판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북한 간의 긴장은 계속되고 있고 북한의 핵개발과 핵무기는 한반도 평화의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다.

사실 평화는 인류가 추구해 온 고상한 가치였지만, 지상에서 실현하기 가장 어려운 과제였다.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긴장과 대립, 폭력과 전쟁이 식어지지 않고 있다. 어떤 점에서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였다. 그러기에 플라톤(Platon, 427~347 BC)은 인류가 소멸되기 전까지는 전쟁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자조적인 말을 했을 정도였다.

평화를 히브리어나 아람어에서는 샬롬(םוֹל), 그리스어로는 에이레네(ἐιρήνη), 그리고 라틴어로는 팍스(pax)라고 말한다. 이 말은 다같이 상호대립하던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을 하지 않기로 체결한 관계를 의미했다. 고대 게르만에서는 평화를 Fridu라고 했는데, 내부적으로는 법의 다스림으로, 외적으로는 군사적으로 보호되는 안전한 공간을 의미했다. 후기에 와서 Frieden으로 변화되었다. 이상의 단어들은 약간의 차이점이 없지 않지만 공통적으로 전쟁이 없는 상태를 칭하는 비전(非戰) 혹은 무전(無戰)의 상태를 칭하는 단어가 된 것이다.

오늘 우리가 말하는 평화에 대한 가르침, 혹은 평화사상은 근원적으로 성경에서 시원(始原)하였고, 기독교 전통에서 발전된 이념이었다. 평화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추구해 온 중요한 가치였다. 예수님은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다”(마 5:9)라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화평케 하는 자’ (peacemaker)는 라틴어로 pacifici인데, 이 말은 넓은 의미로 평화를 위해 일하고, 대립이나 투쟁, 피 흘림이나 폭력, 그리고 전쟁을 없애기 위해 싸우는 이들을 의미했다. pacifici는 좁은 의미로 군복무를 반대하는 이들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런 배경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비폭력, 비전 혹은 반전 이념을 추구하는 정신을 평화주의(pacifi sm, Pazifismus)라고 말하고, 이를 주창하는 이들을 기독교 평화주의자(Christian pacifists)라고 부른다. 그런데 pacifism이란 단어가 1904년에 출판된 옥스포드 사전(The Complete Oxford Dictionary)에는 포함되지 않았고, 1982년 간행된 옥스퍼드 사전에 처음 실리게 된다. 이 점은 평화주의가 최근의 관심사였다는 점을 반영한다. 

그렇다면 초기 기독교회, 교회지도자들 혹은 교부들은 전쟁과 평화를 어떻게 이해했을까? 이 점에 대해 몇 차례 소개하고자 한다. 주요 사건과 인물을 중심으로 전쟁 없는 평화에 대한 여러 구상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분명한 사실은 전쟁은 이 세상에서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만행이라는 점이다. 이 점은 역사가 보여주는 실상이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1천5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제2차 대전에서는 이보다 8배 많은 7천만 명에서 1억3천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3년 1개월 간 지속된 6.25 전쟁에서는 군인 270만여 명과 민간인 250만여 명(남한 99만968명, 북한 150만)이 죽거나 다쳤고, 남편을 잃은 과부는 30만여 명에 달했다. 이들에게 딸린 자녀들이 약 51만7천 명이었다. 10만 명의 고아가 생겨났고, 이산가족은 1천만 명에 달했다. 이런 우리의 역사를 생각해 보면 평화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소중한 가치라고 할 수 있다.

백석대 석좌교수·역사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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