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사과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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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사과란 무엇인가
  • 손동준 기자
  • 승인 2021.11.02 01: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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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저녁이었다. 일과를 마치고 편안하게 볼일을 보려고 앉았는데 전화가 울렸다. 기자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친형이었다.

여느 때와 다른 바 없는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였는데, 약간 긴장한듯한 떨림이 느껴지는 묘한 인사말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형이 너한테 사과하려고 전화했다.”

사과? 먹는 사과 말고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빈다’는 뜻의 사과 말인가? 사연은 이랬다. 투닥거리는 사춘기 조카들에게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라”고 훈계를 한 모양이다. 그랬더니 큰 애가 자기도 머리가 제법 컸다고 “아빠나 삼촌한테 잘 하라. 할머니한테 다 들었다”고 받아친 모양이다. 형도 처음에는 장난 반 진담 반으로 일단 기자에게 전화부터 한 것 같다.

“동생아. 내가 너 네 살 때 다락에서 밀었던 거 미안하다. 열 살 때인가 교회 지하실에 비 많이 와서 무릎까지 물 찼던 날 먼지 나게 때린 거 미안하다. 너 중학생 때 청소기로 때린 거 정말 미안하다…”

변기 위에서 맞이한 40대 남성의 수줍은(?) 고백이 처음에는 어색하고 당황스러웠는데 듣다 보니 기분이 이상하다. 형도 그랬는지 “야 이상하게 눈물이 나려고 한다”며 살짝 음성이 떨리기까지 했다. 그렇게 서너 가지 더 읊는데 마음 속에 묵직한 무언가가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형을 참 미워했었다. 늘 무서웠고 지독하게 싫었다. 둘 다 성인이 되고 형이 큰 병에 걸린 후에야 조금은 누그러졌다고 생각했지만, 마음 한쪽에 늘 상처가 찌꺼기처럼 남아 있었다. 그런데 형의 구체적이고 진지한 사과에 순간 마음이 녹았다.

그리고 며칠 뒤에 진짜 ‘사과’가 집으로 배달됐다. 보낸 이의 마음이 담겨서인지 더 달았다.

얼마 전 정치판에서도 사과가 이슈였다. 한 정치인의 사과 후 행동이 비난을 샀다. 진정한 사과는 구체적이고 진지해야 함을, 그리고 더 중요한 건 사과 이후의 모습임을 여러모로 실감하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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