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기 목사의 마지막 대담] “나의 축복론은 가난하고 병든 자를 향한 복음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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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기 목사의 마지막 대담] “나의 축복론은 가난하고 병든 자를 향한 복음전파”
  • 이현주 기자
  • 승인 2021.09.14 14: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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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30주년 특별기획] '한국교회 巨木을 만나다'
세계 최대 교회 이룬 희망과 긍정의 아이콘 조용기 목사

<편집자 주>

한국교회의 거목이자 희망과 긍정의 아이콘인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원로목사가 14일 향년 86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한국교회 부흥을 선도하며 세계 최대의 교회를 이룬 고인의 업적을 되돌아보며, 본지가 창간 30주년 특별기획으로 진행한 2018년 인터뷰를 다시 되짚어본다. 본지와의 대담은 조용기 목사가 기독교 신문사와 진행한 생전 마지막 인터뷰로 한국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미래를 제시해준다.

한국교회가 갈 곳을 모르고 있다.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의 말씀인 성경이 있고, 몸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중심을 잃고 흔들리고 있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전파된 지 130여년, 한국교회는 우리 사회의 등불이자 희망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과연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한국의 현대사는 숱한 고비와 굴곡을 겪었다. 모두들 불평만하고 있었다면 결코 지금의 대한민국을 이룰 수 없었다. 한국 사회가 일어서도록 손 내밀고 이끌어준 곳이 바로 ‘교회’다. 분명한 것은 시대의 선구자로, 시대의 예언자로 버텨온 교회가 있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가능했다.

본지는 창간 30주년을 맞아 대한민국의 발전과 함께 한국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이끈 거목(巨木)들을 만나기로 했다. 그들이 겪어온 과거와 우리가 맞이할 미래는 다르지 않다. 과거는 미래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거목’으로 세계 최대의 교회를 일구며 한국사회에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 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 조용기 목사를 만났다. 그가 말하는 긍정과 감사, 그리고 축복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조용기 원로목사는 올해 성역 60주년을 맞았다. 그는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복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전하는 곳이 교회라고 강조했다.
조용기 원로목사는 올해 성역 60주년을 맞았다. 그는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복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전하는 곳이 교회라고 강조했다.

‘조용기’. 이 이름 석 자를 들으면 떠오르는 여러 가지가 있다. ‘성령충만’, ‘기도’, ‘폐결핵’, ‘천막교회’, ‘세계 최대교회’ 등이다. ‘절대긍정’과 ‘삼중축복’도 조용기 목사를 수식하는 단어들이다. 지금도 해외에서는 조용기 목사의 설교를 듣고 기도를 받기 위해 성도들이 몰린다. 그가 남긴 축복의 메시지와 신유의 기적은 아직도 세계 곳곳에 회자되고 있다.

조용기 목사는 올해로 성역 60주년을 맞는다. 1958년 대조동에서 천막교회를 개척한지 꼭 60년이 됐다. 가난한 청년이 온몸으로 뛰어가며 세운 교회가 이렇게 부흥할 줄 누가 알았을까. 하지만 조용기 목사 자신은 알고 있었다.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가난하고, 아프고, 소외된 이웃들이 우리 사회에 많다는 것을… 그렇기 때문에 복음전파의 노력을 게을리 할 수 없었다. 지난 60년 간 휴가를 단 한 번도 쓰지 못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힘들었지만 행복했다. 조용기 목사는 지금도 그 시절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 올해로 성역 60주년을 맞으십니다. 마치 영화 필름처럼 지난 시간이 생생히 떠오르실 것 같습니다.

“60년 세월인데, 지나간 것은 마치 하룻밤과 같습니다. 긴 세월이지만 돌아보면 어제 같습니다. 교회를 세우겠다고 남의 깨밭에 천막을 쳤어요. 남대문시장에 가서 임시 천막을 사서 걸머지고 불광동까지 걸어왔습니다. 그리고 천막을 세웠어요. 그런데 깨밭 주인이 허락도 없이 남의 밭에다가 천막을 쳤다고 신고해서 경찰서에 불려가 꿇어앉아 있었어요. 그때 어떤 기자가 사연을 듣더니 ‘교회가 사회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노력하는데 격려는 못할망정 꿇어 앉혔다’고 오히려 경찰하고 주인에게 야단을 했어요. 그래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개척이라는 것이 지금처럼 누구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때는 거지처럼 빈손 들고 복음을 전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즐거운 기억이에요.”

1936년생인 조용기 목사는 불교가정에서 태어나 하나님을 모르고 자랐다. 그런 그가 하나님을 만나게 된 건 죽음을 목전에 둔 어느 날이었다. 불과 17세의 나이. 그에게 엄습한 폐결핵은 삶을 점점 조여 왔다. 그러나 병석에서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영어사전을 외우고, 교과서를 독파했다. 그렇게 집에서 긴 투병을 하던 어느 날 병문안을 온 누나의 친구를 통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했다.

본격적인 성령체험은 부산의 한 거리에서 열린 천막 부흥회에서였다. 분명한 확신이 없던 그는 간절한 마음으로 금식기도를 시작했고, 환상 중에 예수님을 만나는 성령 체험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삶이 변화된 순간이다. 신학공부를 하기 위해 서울로 상경했고, 순복음신학교에 들어갔다. 그리고 1958년 대조동 최자실 목사의 집에서 교회를 개척했고, 성도가 점점 늘어나자 천막을 치고 거리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렇게 지금의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시작됐다.

- 천막으로 시작한 교회가 이렇게 부흥할 줄 아셨습니까? 왜 하나님은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축복하셨을까요?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했어요. 요한삼서 1장 2절 말씀이 중심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잘 될 것이다, 나을 것이다, 이런 희망을 주고 싶었습니다. 그때 산비탈 판자촌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이 교회를 찾아왔습니다. 희망이라고는 보이지 않을 때, 그들에게 성경 속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힘주어 전했습니다. 좋은 하나님이라고, 용기와 희망을 가지라고 말했습니다.

조용기 목사가 처음 교회를 개척했던 대조동 천막교회 사진제공=순복음가족신문
조용기 목사가 처음 교회를 개척했던 대조동 천막교회 사진제공=순복음가족신문

1958년 대조동에서 천막치고 교회 개척한지 60년째

평생 하루 3~5시간 기도, 목사가 먼저 성령 충만해야

사람은 희망 없이는 못 살아… 예수 그리스도가 희망

그런데,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을 중심으로 설교를 하니까 그 사람들이 교회로 와요. 의지하고 위로 받을 데가 교회밖에 없으니까… 교회에 와서 희망을 찾고 다시 일터로 가곤 했습니다. 한 성도는 시장 일을 마치면 팔다 남은 생선을 들고 교회에 와서 새벽기도하고, 다시 시장으로 일을 나가기도 했습니다. 예배당에 생선 냄새가 진동했어요. 성도들은 싫어했지만 그렇게 열심이셨던 권사님은 지금 가족 모두가 구원받고 행복하게 살고 계십니다. 희망을 이룬 것입니다.”

- 이런 희망이 교회를 부흥시키고, 동시에 우리 사회의 발전에도 도움을 준 거군요.

“목회를 해보면, 인간은 희망이 없이는 못삽니다. 그래서 강력하게 희망을 전했어요.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시고 자기 목숨을 바쳐 죄인을 의롭게 만드시고 병을 고쳐주신 예수님, 우리를 먹고 마시게 해주시고 천국으로 인도해주시는 분, 그런 하나님을 통해 ‘희망’을 이야기 했더니 성도들이 많이 찾아왔습니다.

대조동에서 성도가 500명이 넘어서니 서대문으로 옮겼고, 마포에 다리가 놓이고 나서 허허벌판인 여의도로 다시 교회를 옮겼습니다. 전 하나님께 “역사상 최대 교회를 세우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10만 명의 교인이 성전에 가득 차게 해달라”고 기도했어요. 정말 놀랍게도 매년 1만 명씩 성도가 늘었습니다. 제가 은퇴할 때 80만 성도였습니다. 여의도에 생기가 돌았습니다. 우리 교회가 새로운 도시를 만든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 목사님께서 하신 간증 중에서 기도하는 일이 가장 힘들다고 고백하신 적이 있습니다.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해 매일 3~5시간씩 기도하셨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가 제일 힘들다고 하셨습니다.

“목사가 설교를 하러 갈 때는 감동을 가지고 가야 합니다. 설교를 잘해도 성도들이 감동을 받지 못하면, 목사가 성령 충만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감동은 말을 잘해서 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 성령 충만해야, 내가 먼저 말씀을 믿고 은혜를 받고 성령을 체험해야 효과가 있습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하루 5시간씩 기도하겠다고 결심했습나더. 새벽기도 나와서 2~3시간 기도하고, 집에 와서 잠들기 전에 2시간씩 기도했습니다. 5시간을 못 채우는 날에도 2시간 이상 꼭 기도합니다. 성도들이 설교에 감동을 느끼도록 성령께서 해주신 것입니다. 지금도 매주 월요일이면 기도원에 들어가 기도로 하나님과 만나고 있습니다.”

조용기 목사의 첫 번째 성도는 자기 자신이다. 주의 종이 먼저 은혜를 받아야 그 은혜를 성도들에게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제가 은혜 받고 변화를 받아야 성도들에게 은혜가 있고, 제가 먼저 감동감화 되어야 성도들이 변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래야 기적이 일어난다고 확실히 믿고 있었다. 성도가 변화되는 목회, 성도가 감동받는 설교를 위해 그는 일생을 바쳤다. 그리고 목숨이 다할 때까지 기도하는 것이 그의 삶이다.

- 그런데 목사님, 희망을 주는 목회도 좋지만 그것이 자칫 ‘기복신앙’으로 비쳐지진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습니다. 목사님의 축복론이 ‘기복신앙’을 불러왔다는 이야기도 있어요.

“예수님이 전한 근본적인 신앙도 기복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 사역의 2/3는 병 고치는 사역이셨어요. 예수님은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셨고, 고난도 극복하게 만드셨습니다. 예수님 자체가 가난을 멸하고 병을 고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 목회를 하려면 우리 사회의 병들고 가난하고 고난받는 사람들에게 용기와 힘을 주어 일어나게 해야 합니다. 용기와 희망을 주는 것이 기복신앙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의 사역을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예수님을 따라서 절대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살도록 했습니다. 꿈을 갖게 했습니다.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합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여기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마음, 항상 긍정적인 말을 하는 삶의 자세, 이것을 목회원리로 삼고 사역했습니다. 한국에서 기복신앙을 전한다며 저를 지목하지만, 저는 제 자신이 불교 가정에서 태어나 폐병에 걸려 피를 토해 죽음 앞에 놓였을 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얻고 이렇게 행복한 목회를 해왔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삶에 가장 큰 복, 가장 큰 성공은 예수님의 구원을 누리는 것입니다.”

한국교회 일각에서는 세계적인 규모의 여의도순복음교회를 불편하게 바라보는 이들이 있다. 조용기 목사의 ‘절대긍정’ 신앙과 ‘축복론’에 대해 비판을 서슴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조용기 목사의 목회는 평생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향해 있었다.

지금도 여의도순복음교회에 가면 아픈 사람들이 교회 주변을 맴돈다. 여의도순복음교회는 대형교회에서 흔히 나타나는 ‘부자교회’가 아니다. ‘서민의 교회’이자 ‘약자의 교회’였다.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에게 희망은 ‘예수님’밖에 없었다. 그가 체험한 예수님이라면 이들에게도 충분히 삶의 희망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용기 목사는 부자들만 모이는 교회, 부자들 중심으로 하는 사역에 대해 부정적이다. 이미 수차례 교회의 귀족화를 비판한 바 있다. 그는 “교회와 성도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확고한 목회철학을 가지고 있다.

가난하고 병든 성도 먼저 돌보니 교회 자연히 부흥

목사의 첫 성도는 ‘나 자신’, 나부터 영적 변화돼야

다시 개척할 수 있다면 행복, 목사가 먼저 살아나길

분명한 것은 그의 목회가 놀라운 성장을 거듭했지만, 결코 성도를 선별하여 목회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복음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늘 먼저 다가가는 복음전도자였다. 아픈 사람에게 성령의 이름으로 치유를 기도하는 기도자였다. 삶에 지친 이들은 자연스럽게 조용기 목사를 찾아갔고, 그것이 지금의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이룬 숨은 힘이 되었다.

조용기 원로목사는 "어린이와 청소년을 놓아버리면 교회는 사라질 것"이라며 "젊은이들에게 투자하는 것이 내일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지지 않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조용기 원로목사는 "어린이와 청소년을 놓아버리면 교회는 사라질 것"이라며 "젊은이들에게 투자하는 것이 내일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지지 않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 이런 약자에 대한 관심이 평양 조용기 심장병원으로 이어진 것인가요?

“동남아 일대 부흥회를 다니다가 심장병으로 죽어가는 아이들 여럿을 보았습니다. 치료도 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아이들이 있어서 우선 살려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세종병원 원장님에게 말해서 같이 시작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폐지 수집운동을 했고, 세종병원에서는 수술을 맡았습니다. 동남아, 아프리카, 남미 등지에서 고통받는 심장병 어린이들의 생명을 살린 것이 5천 건을 넘겼습니다. 그런데 북한에는 병자가 얼마나 많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돈이 없어 수술도 못할 텐데… 우리에게 허락을 해준다면 심장병뿐만 아니라 다른 병도 고쳐주고 싶은데 북한이 지금 저러고 있어서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 목사님은 반공주의자 아니십니까? 북한을 돕기란 쉽지 않았을 텐데요.

“북한은 공산주의가 아닙니다. 진정한 공산주의는 힘 있는 사람은 잘 살고, 힘없는 사람은 못 사는 비뚫어진 사회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더불어 잘 살게 하겠다는 개념이 공산주의입니다. 그런데 지금 북한은 어떻습니까? 북한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전제주의고 독재주의 국가입니다. 김일성 일가의 독재주의입니다. 그러나 북한이 밉다고 백성들을 병들어 죽어가게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병원을 짓기로 했습니다. 처음 평양에 가서 한 주일 설교는 평생 잊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에 대한 말씀을 전했는데 북한 사람들이 많이 울더라고요. 빨리 복음이 들어가면 좋겠습니다. 병원은 지금 어떻게 되어 있는지 상황을 모르고 있습니다.”

- 요즘은 개척도 안하고 목회하기도 어렵다고 합니다.

“목사가 살아야 성도들을 살릴 수 있습니다. 목회가 아무리 힘들어도 성령으로 극복하고 교회를 세워야 합니다. 작은 것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하면서 대형교회를 비판하기도 하는데, 저는 지금도 젊은이들에게 큰 꿈을 가지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큰 교회를 이루고 그 곳에서 전 세계적으로 헐벗고 주리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도와주라고 하고 싶습니다.”

- 서대문 시절, 교회가 부흥하고 목회에 바쁘실 때도 직접 어린이 부흥회를 인도하셨던 기록이 기억에 남습니다. 결국 어린이가 한국교회의 미래가 아닐까요?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놓아버리면 교회는 세상에서 사라집니다. 전 어린이와 청소년, 청년 중심의 목회를 했어요. 예산 아끼려고 사역자 쓰지 않고 제가 직접 다 하던 시절이 있었어요. 나중에는 팀 사역의 중요성을 깨닫고 주일학교 담당과 예산을 따로 세워서 하나님 앞에 일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각각 분리해서 부흥시켰습니다. 젊은이들, 청소년들을 교회가 등한시 하면 교회는 없어져버리고 맙니다. 평신도도 교역자도 사라집니다. 젊은이들에게 투자하는 것은 내일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60년 목회생활에서 정식으로 휴가 한 번 가지 못했다. 하나님이 주신 시간과 건강을 어떻게 휴가로 보낼 수 있냐고 했다. 하루 종일 뛰다보면 꾸벅꾸벅 조는 날도 많았다. 어떤 날은 새벽 동이 환하게 튼 다음에 일어나 허겁지겁 성경책만 들고 교회로 뛰어갔다. 성도들이 눈을 가리고 “빨리 다시 집으로 가시라”며 웃길래 둘러보니 위에는 양복 재킷에 잠옷 바지 차림이었다. 서대문 목회시절을 이야기 하는 조용기 목사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다시 20대로 돌아가면 교회를 또 개척하시겠냐고 묻자, “개척하고 말고”라며 활짝 웃었다. “지금도 개척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는 그는 천생 목사였다.

“목사는 힘들지, 힘들어야 성령의 능력으로 극복하고 교회를 세우고 하는 것이 아니겠냐”는 조용기 목사는 “목사가 살아야 성도들이 산다”고 말했다. “모두들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하지만 큰 교회는 그만의 사역이 있다”며 “큰 꿈으로 목회에 도전하라”고 당부했다. 아직 세상에는 병들고 굶주린 이웃들이 많기에 복음을 전하는 일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했다.

83세. 세상의 나이가 그의 열정을 막을 수 없다. 지금이라도 천막을 치고 교회를 개척하고 싶은 그는 영원한 청년이고 개척자다. 60년 목회에서 부흥의 비결은 단 하나였다. 목사의 첫 성도는 나 자신이기에 내가 먼저 성령 충만하고 은혜를 받아야만 성도들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 결국 목회 성패는 ‘목사’의 영성에 있음을 다시금 각인시켜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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