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순복음교회 설립자 조용기 원로목사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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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순복음교회 설립자 조용기 원로목사 별세
  • 이인창 기자
  • 승인 2021.09.14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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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4일 오전 향년 86세 일기… 한국교회장(葬)으로

1958년 천막교회 설립 후 희망의 복음으로 부흥 성장

절대긍정의 믿음 전해, “구원 누리는 것 가장 큰 성공”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원로목사가 지난 14일 향년 86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원로목사가 지난 14일 향년 86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사진제공=여의도순복음교회 

한국교회 부흥을 선도하며 세계 최대의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일군 바 있는 조용기 원로목사가 지난 14일 오전 713분 서울대병원에서 향년 86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조 원로목사는 지난해 7월 뇌출혈로 쓰러진 뒤 병원치료를 받아왔다.

빈소는 여의도순복음교회 베다니홀에 마련된 가운데 15일 오전 7시부터 밤 10시까지 조문이 가능하다. 장례예배는 오는 18일 오전 18시 여의도순복음교회 대성전에서 진행될 예정된 가운데 한국교회장으로 치러진다. 장례위원장은 한국교회총연합 공동대표회장 장종현, 소강석, 이철 목사가 맡았으며, 장례예배 설교는 극동방송 이사장 김장환 목사가 전한다.

유족으로는 희준, 민제, 승제 3남이며 부인 고 김성혜 전 한세대 총장은 올해 2월 별세했다.

조용기 목사는 1936년 경남 울주군에서 5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한국전쟁 당시 피난을 갔다 부산공고에 입학하고, 주둔해 있던 미군부대에서 학교장과 미국 부대장 사이 통역을 맡으면서 영어 실력을 키웠다.

고교 2학년 때는 폐결핵에 걸려 사망선고를 받았다가 누나 친구로부터 처음 복음을 접했다. 당시 부산에서 미국 오순절교단인 하나님의성회(Assemblies of God)’ 소속 켄 타이스(Kenneth Tice) 선교사의 집회 통역을 하면서 회심을 하고 폐결핵이 치유되는 신유의 경험을 했다.

조용기 목사가 처음 교회를 개척했던 대조동 천막교회 사진제공=순복음가족신문
조용기 목사가 처음 교회를 개척했던 대조동 천막교회 사진제공=순복음가족신문

조 목사는 1956920살 나이에 서울에 올라와 하나님의성회 순복음신학교에 입학해 장모이자 목회 동역자가 될 고 최자실 목사(1989년 작고)를 만나게 된다. 신학교를 졸업한 직후 1958518일 고 최자실 목사(1989년 작고)와 함께 서울 은평구 대조동(현 불광동) 천막교회를 시작하고, 1965년 김성혜 전 총장과 결혼한다.

그는 오중복음과 삼중축복, 4차원 영성을 바탕으로 한국전쟁 이후 극도의 빈곤과 실의에 빠져 있던 한국 사회에 희망의 메시지를 복음을 통해 전했다. 요한삼서 12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는 말씀을 한결같이 선포했다.

조용기 원로목사는 2018년 본지와 가진 신년 특별대담에서 당시를 회고한 바 있다.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했어요. 잘 될 것이다 나을 것이다, 이런 희망을 주고 싶었습니다. 그 때 산비탈 판자촌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이 교회를 찾아왔습니다. 희망이라고는 보이지 않을 때, 그들에 성경 속 하나님은 복 주시는 분이라고 전했습니다. 좋은 하나님이라고, 용기와 희망을 가지라고 말했습니다.”

5명 교인으로 시작했던 교회는 폭발적으로 부흥 성장했다. 대조동 교회에서 서대문 교회를 거쳐 1973년에는 모두가 말리는 가운데서도 여의도 허허벌판 약 1(3천여평) 부지에 현재 대성전을 건축했다. 1979년에 10만 명, 1981년에 20만 명을 넘어서며 폭발적인 부흥 성장이 일어났다. 1993년에는 교인 수 70만명을 넘어서며 세계 최대 교회로 기네스북에 등재되기도 했다.

조용기 원로목사는 한국 교회와 사회뿐 아니라 전 세계에도 한국 대표하는 인사 중 한명으로도 알려져 있다. 특히 세계 교회에 본격적으로 알려진 계기는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한국에서 개최됐던 19739월 제10차 세계오순절대회였다.

1976년에는 세계교회성장기구 곧 CGI(Church GrowthInternational)를 설립해 세계 교회의 성장을 도왔고, 1992년부터 2008년까지 세계하나님의성회 총재를 역임하면서 제3세계 선교에 박차를 가했다. 이때 아프리카 아시아 남미 등에서 대규모 성회를 인도하고 강력한 성령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구 소련의 붕괴 후인 19926월에는 모스크바에서 성회를 가졌고, 1997년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가진 성회에서는 150만 명이 운집, 두 나라에서 모두 개신교 사상 최대의 집회라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조 목사는 1975년부터 2019년까지 71개국에서 최소 370차례 부흥회를 인도했고, 비행 여정을 보면 지구를 120바퀴 이동한 셈이었다.

1994년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회에서 설교하는 조용기 목사. 사진=여의도순복음교회

이런 목회 사역이 가능했던 동력을 조 목사는 기도에서 찾았다. 목회를 하면서 하루 5시간 씩 기도하겠다고 결심했고, 하나님 앞에서 성령 충만해야 자신이 먼저 은혜를 받고 성령을 체험해야 한다는 목회 신념 때문이었다.

조용기 목사는 희망을 주는 목회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기복신앙을 강조한 나머지 값싼 복음을 만들었다는 비판이 늘 뒤따라 다녔다. 그는 본지 대담에서 배고픈 사람을 먹이시고 고난도 극복하게 만드셨던 예수님을 따라서 절대 긍정적인 마음을 갖고 살도록 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목회를 하려면 우리 사회의 병들고 가난하고 고난 받는 사람들에게 용기와 힘을 주어 일어나게 해야 합니다. 용기와 희망을 주는 것이 기복신앙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의 사역을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우리 삶에 가장 큰 복, 가장 큰 성공은 예수님의 구원을 누리는 것입니다.”

2007년 평양에서 있었던 조용기심장전문병원 착공식.

조 원로목사가 한국 사회와 교회, 세계교회에 미친 긍정의 영향은 컸다. 1982대통령 표창’(홀트학교 건립기금 및 장애아동 복지사업) 수상, 1994년 대한적십자사 적십자헌혈유공자 금장’, 1996국민훈장 무궁화장’(심장병어린이 무료시술 지원 및 소년소녀가장 돕기), 2005년에 미국 뉴욕기독교교회협의회 더 패밀리 오브 맨 메달리온수상, 2007년 미연방의회 자랑스런 한국인 인증서’, 2009년에는 캄보디아 정부 훈장 등은 고인의 발자취에 대한 작은 평가라고 할 수 있다.

열악한 의료 환경에 놓여 있는 북한 주민과 어린이들을 돕기 위해 2007년 평양 심장전문병원 설립 추진에 나선 것도 여의도순복음교회와 조 원로목사가 내딛을 수 있는 걸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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