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지 않고 전도하면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일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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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지 않고 전도하면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일하십니다”
  • 서현주 목사(다오라교회)
  • 승인 2021.09.01 13: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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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간증수기 당선작 - 끊임없이 전도하는 목회자 다오라교회 서현주 목사 (상)

3년 전 재래시장서 개척 후 복음전파 소명 감당
코로나19에도 예배와 전도는 끝까지 포기 안 해

백석총회 목회협력지원센터는 코로나19 때문에 어려운 목회 현장을 격려하고 참신한 목회 대안을 발굴하기 위해 ‘목회간증수기’를 공모했다. 다수 작품이 응모한 가운데 생생하고 은혜가 넘치는 간증 작품들이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수기 작품 중 목회협력지원센터의 추천을 받아 게재한다.

서현주 목사
(다오라교회)

고향 익산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서울에 올라가 직장생활을 하다가 28살 때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하고 딸과 아들 하나씩을 두게 되었습니다.
결혼을 하자 남편은 사업을 독립하였고 젊은 나이에 사업이 잘되어 부러울 것 없이 생활 했습니다. 잘 살 줄 알았는데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IMF가 터져 모든 사업을 정리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노력하여 모아둔 재산이 하루아침에 허무하게 무너져 내린 것에 실망한 남편은 남은 재산을 정리하여 고향 전북 익산으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아직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어린 두 아이를 데리고 고향에 내려온 남편은 상실감에 빠져 한동안 술로 세월을 보내며 일도 하지 않은 채 가족을 힘들게 하였습니다. 
마음 둘 곳 없는 저는 좋은 교회를 만나면서 방황이 끝이 났습니다. “인생의 방황은 하나님을 만남에서 끝이 나고 신앙생활의 방황은 좋은 교회에서 끝이 난다”는 말씀처럼 교회는 제 인생을 180도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익산에 내려와 첫째 아이가 7살 되던 어느 날 갑자기 경기를 일으켜 쓰러져 큰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았으나 원인을 찾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살려만 주면 하나님을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하겠다고 서원하고 저는 매일 교회 가서 청소하고 모든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낮에는 전도하면서 사는 게 제 삶의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 전도를 나가면서 아이의 건강도 좋아지고 전도할 사람도 붙는 것입니다. 전도에 정신없이 사니 남편은 그때부터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가지고 내려온 돈도 거의 바닥이 났습니다. 남편은 일자리를 구할 생각도 안하고 매일 술을 마시고 저를 핍박하는 일이 하루의 삶이었습니다.
저는 아이들과 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교회 생활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보험회사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먹고 살아야 하고 주의 일을 낮에도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에 조금만 하고 그만 두어야겠다는 마음으로 보험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더욱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계속해서 전도를 하다 보니 매주 2~3명씩 영혼을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전도를 잘하다 보니 주변의 사람들이 저에게 신학을 공부하라고 권유하였습니다. 처음엔 “내 형편에 무슨 공부람. 당장 먹고 살기도 힘든데… 그리고 남편이 신학공부를 하라고 할 사람도 아닌데…” 생각하며 주변 사람들의 말을 한 귀로 흘렸습니다.

 그런데 보험 영업은 육신적으로 지쳐가게 했고, 기를 쓰고 돈을 벌어도 남편이 벌지 않으니 밑 빠진 항아리에 물 붓는 것 같았습니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해야 하는 무게감에 하루하루가 고통스러웠습니다. 
이렇게 살 바에는 차라리 내가 평생하고 싶은 주님 일을 하고 사는 게 마음이라도 평안하겠다고 생각하고 서서히 신학에 대한 공부의 열정이 내 가슴에 파고들었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신학공부를 하고 싶은데 내 형편으로는 할 수 없으니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세요. 그리고 나를 핍박하는 남편에게 신학을 공부하겠다고 말을 해서 허락지 않으면 저는 다시는 신학 공부할 생각을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용기가 나지 않아 남편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당시에는 핸드폰이 없었기에 전도할 대상자들을 만나면 항상 내가 만난 예수님에 대해 손 편지를 10장 이상씩 써가며 전도하는 때였습니다.
 그렇게 핍박하던 남편도 제 편지를 받고 며칠간 말이 없더니 어느 날 살아온 삶을 회개하며 돌아온 탕자의 모습으로 불쑥 한마디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 싶으면 신학공부 해.”
사람의 생각으로는 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남편의 마음을 열어 주어 제가 신학을 공부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8년간의 보험생활은 그만 두고 신학교를 등록하고 전도사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018년 3월 3일 목사안수를 받고 3월 17일 개척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
목회자의 길을 결심하고 난 후 어느 날 극동방송을 듣다가 마태복음 11장 28절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말씀이 제 가슴에 꽂혔습니다. 목회자가 되어 교회를 개척하면 누구나 와서 쉼과 안식을 누리도록 한다는 뜻에서 ‘다오라교회’로 정하겠다고 하나님과 약속했습니다. 
“하나님 익산에 한 가운데 큰 도로 옆에 교회를 주세요.” 그렇게 기도하고 다니다가, 익산 한 중앙에 상가 임대 자리가 눈에 띄어져 계약을 하게 되었습니다.
 교회를 막상 개척하려고 하니 가장 필요한 것은 물질 부분이었습니다. 제가 계약금이 없어서 교회 성도님이 돈을 빌려주어 계약을 하고 남편에게 교회 상가를 계약하였다고 했습니다. 얼마 후 걱정하던 남편은 가진 돈이 없다며 2000만원 은행 대출을 받아 줄 테니 그 돈으로 교회 집기 및 인테리어를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잘 할 수 있어, 한번 해봐. 그런데 교회다운 교회를 해야 해. 욕심 부리지 말고 내 것 챙기려 하지 말고 남을 위해서 한번 해봐” 하며 위로를 해줬습니다.

돈이 많이 필요한 상황에서 남편은 직접 시간 날 때마다 교회 인테리어를 해준다고 했습니다. 낮에는 일용직으로 건설현장에서 일하고 돌아오면 밤늦게까지 혼자 교회 공사를 했습니다. 교회 인테리어도 어느 정도 틀을 잡아가던 중 어느 날(2017년 12월 21일) 오후 추운 현장에서 일을 하던 남편이 갑자기 급성심근경색으로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받게 되었습니다. 아침에 출근하고 점심에 통화도 했는데 누구에게도 말 할 수 없는 믿어지지 않는 일이 현실에 벌어졌습니다. 정신없이 병원에 가보니 남편은 싸늘한 시신의 모습이었습니다.
 아무리 흔들어도 깨어나지 않는 남편. 교회를 잘 해보라고 인테리어를 직접 해주겠다고 밤낮 안 가리고 일을 했던 남편. 장례를 마치고 교회에 들어오니 남편의 손 때 묻은 장비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습니다. 

“하나님 저 혼자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의지 하려고 하면 언제나 하나님은 멀게 하시고 걷어 가셔서 저를 혼자 남게 하십니까?”

혼자 텅 빈 교회 바닥에서 울면서 통곡 하고 통곡 하고…. 그러나 교회를 포기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누구라도 사람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중 평신도 때 전도했던 남자분이 생각이 났습니다. 이 남자 분은 제가 전도한 자매와 결혼을 해서 자녀 셋을 두고 신앙생활을 잘 하고 사는 성도님이었습니다.
 남편 장례 때 이 분이 “전도사님! 제가 도울 일이 있으면 돕겠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기에 전화를 하여 만나게 되었습니다. 남편이 대출을 받은 2000만원이 전부라고 하였더니 이 남자 성도님은 알았다고 하면서 손수 페인트를 칠하고 타일을 붙이고 4천만원 정도 돈이 드는 인테리어를 2,000만원에 해 주었습니다.
가진 돈이 없이 시작하였지만 결국 하나님은 남편의 빈자리를 전도한 사람을 통해 교회를 세우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핍박하는 남편을 통해 저를 연단시키시고 남편을 구원하셔서 밀알이 되어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남들 보기에는 홀로 가는 길이지만 영적으로는 주님이 하신 일로 순종하며 전도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하며 눈물과 땀으로 계속 전도를 하였습니다.

다오라교회 서현주 목사와 성도들은 코로나로 어려운 상황에서 한결 같이 전도하고 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우리 다오라교회에 출석하는 성도 99%는 제가 노방전도와 병원전도를 하면서 직접 교회로 인도하고 정착하게 한 성도들입니다. 아는 지인들이 아니라 생판 모르는 사람을 만나 기도하고 문자 보내고 만나고 이렇게 관계를 맺으면서 교회로 인도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 성도들은 이제 만 2세가 된 어린 양들입니다. 전도사 시절 큰 교회에서 사역할 때에는 전도만 하면 각 부서에서 양육하였지만 개척교회에는 자원이 없다보니 저 혼자 말씀으로 먹여주고 입혀주고 하나부터 열까지 신경 쓰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조금만 소홀해 지면 연락도 안 되고 10명 전도하면 1명 정착할 정도로 뿌리를 내리는 데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도는 매일 쉬지 않았습니다. 평신도 때부터 붙잡았던 마태복음 6장33절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말씀에 더욱 매달렸습니다.

“힘들고 사방이 가로 막혀도 먼저 그의 나라 구하면 더해주신다고 하나님은 약속하셨지! 그래 전도만이 살길이다” 하면서, 함께 전도할 성도가 없다 보니 저 혼자 재래시장 한복판에서 차를 나누어 주면서 전도를 합니다. 여름날에는 옷이 땀으로 흠뻑 젖고 겨울에는 손이 꽁꽁 얼었지만 누구라도 우리 교회에 와야 한다는 그런 절박한 심정이었습니다.

<다음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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