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음악 산증인 '박재훈 목사' 별세, “하나님께 영광으로 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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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음악 산증인 '박재훈 목사' 별세, “하나님께 영광으로 족합니다”
  • 이인창 기자
  • 승인 2021.08.03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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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일 향년 99세… 암 투병 중에도 작곡 열정
301장 ‘지금까지 지내온 것’ 등 다수 찬송가 작곡

8·15 해방 직후 일본군가 탈피한 국민동요 보급
3.1운동 100주년 오페라 '함성1919', 마지막 방한
2019년 2월 방한 당시 박재훈 원로목사(오른쪽). 40년을 준비한 오페라 '함성 1919' 공연 무대를 위해 의사들의 만류를 무릅쓰고 박 원로목사는 마지막으로 고국을 방문했다.
2019년 2월 방한 당시 박재훈 원로목사(오른쪽). 40년을 준비한 오페라 '함성 1919' 공연 무대를 위해 의사들의 만류를 무릅쓰고 박 원로목사는 마지막으로 고국을 방문했다.

한국교회 성도들이 애창하는 찬송가를 다수 작곡한 토론토큰빛교회 박재훈 원로목사가 캐나다 한국 시간으로 지난 2일 밤 10시경 만 99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1922년 강원도 김화 태생의 박재훈 원로목사는 찬송가 301지금까지 지내온 것’, 527어서 돌아오오’, 515, ‘눈을 들어 하늘 보라’, 592산마다 불이 탄다’, 578언제나 바라봐도등을 작곡했다. 현재 한국교회가 사용하는 찬송가에는 그의 작품이 9곡이나 수록돼 있다.

박 목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동요작곡가로 귀한 곡들을 남기기도 했다. ‘어머님의 은혜’, ‘산골짝의 다람쥐’, ‘송이송이 눈꽃송이’, ‘펄펄 눈이 옵니다’, ‘시냇물은 졸졸졸졸등 우리나라 국민들 기억과 마음 속에 남아 애창되고 있는 동요들도 그의 작품이다. 

여러 해 전부터 갑상선암을 앓고 있었던 박 목사는 최근 병세가 악화돼 입원했다가 나흘 만에 별세했다. 20192월에는 암 투병 중 발생한 폐렴으로 인해 의사들이 만류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작곡한 3.1운동 100주년 기념 오페라 함성 1919’ 초연을 직접 보기 위해 마지막으로 고국을 방문한 바 있다.

함성 1919’1972년 사무엘 마펫 선교사의 권유로 처음으로 작곡했던 오페라 에스더를 비롯해 유관순’, ‘손양원을 잇는 네 번째 박 목사의 오페라 작품이었다.

특별히 815일 광복절을 앞두고 박재훈 원로목사의 별세 소식은 한국교회 성도들뿐 아니라 국민들에게도 남다른 의미를 전한다. 일제 치하에서 나라를 잃고도 해방을 꿈꾸며 신앙을 지키고자 했던 민족의 역사를 생전 생생하게 증언했다. 

만세 한마디 했다고 칼에 맞고 불에 타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제암리교회는 스코필드 선교사가 일제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렸지만 누군가 발표해주지 않아 잊혀진 채 죽은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전국의 교회, 북간도와 서간도의 교회에도 예수를 믿고 만세를 불렀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은 죽어야했습니다.”

20192월 방한 당시 만난 박재훈 원로목사는 천국에 가기 전 마지막 숙제와 같은 마음으로 3.1운동에 대한 작품 '함성 1919'를 썼다고 말했다. 

박 목사는 “1973년 이민을 가서 음악공부를 더한 후 그 고통의 역사를 3.1운동 작품으로 쓰겠다고 생각했다. 10년이면 될 것 같았는데 세월이 이렇게 흘렀다.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라면서, 40년 준비 끝에 발표하는 작품에 대해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그런 사명 의식 때문에 박 목사는 오페라 함성 1919’를 구순이 넘긴 나이(2013)에 작곡하기 시작해 6년 동안이나 창작열을 불태워가며 완성했던 것이다.

고인의 작품 활동은 나라 사랑과 순수한 신앙과도 맞닿아 있었다. 작곡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었다. 일제 치하에서 순교 신앙을 직간접 경험했던 박 목사는 당시를 생생하게 증언해 주었다.

일사각오 설교를 하신 산정현교회 주기철 목사님이 순교하셨을 때 평양에 있었습니다. 그 분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평양의 공기가 일순간 다 얼어붙었어요.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도 그랬어요. 20대 때였는데 평양의 교회들은 일제와 싸우면서 순교를 생각했던 시절이었습니다.”

당시 박 목사는 평양에서 2백리 정도 떨어진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마침내 1945815일 해방을 맞아 기쁨도 컸지만, 20대 교사 박재훈은 당장 9월 개학해서 우리 아이들이 부를 노래가 없었던 것이 큰 걱정이었다. 일본군가에 맞춰 부르는 노래 일색이었던 당시, 박 목사는 당시 기독교서회에서 발행하던 아동잡지 아이생활’ 50권을 빌려서 골방에서 곡을 작곡했다. 단 사흘 만에 50곡이나 된 곳을 작곡했다.

그 중 25곡을 남겼어요. 그런데 공산당이 평양을 점령하면서 살 수 없게 되어서 1946년 부활주일 아침에 38선을 넘었습니다. 서울에 와도 동요가 없는 것을 보고 동요 악보를 등사기로 직접 밀어서 명동의 국제음악사 앞에 쌓아놨는데 이틀 만에 다 나간 거예요.”

대한민국 국민들의 가슴에 남아있는 아름다운 동요들은 바로 그 때 만들어진 작품이었다. 등사기로 밀었던 악보 속 곡들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교과서에도 많이 실리게 되었다. 

찬송가곡을 작곡한 것 역시 그의 남다른 신앙과 나라 사랑 정신이 깃들어 있다. 1960년대 한국찬송가위원회가 찬송가집을 발간하려고 할 때 대부분 외국 곡을 사용한 것이 그에게는 가슴 아팠다. 공모가 진행됐지만 곡을 지원하는 사람들마저 거의 없을 때, 박 목사가 작곡해 두었던 곡들을 사용할 수 있었다. ‘어서 돌아오오는 그가 21살이던 1943년 작곡해둔 곡이었다.

“1946년 서울에서 처음으로 오페라 춘희’, ‘카르멘을 보았을 때 내용이 참 악하다고 여겨서 오페라를 싫어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음악으로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회 음악은 찬송가에만 국한되지 않아요. 음악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으로 족합니다.”

고 박재훈 원로목사는 100년의 일생 동안 음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사명이었고, 행복이었던 믿음의 사람으로 기억될 것이다. 

 

故 박재훈 원로목사는?

박재훈 원로목사는 1922년 강원도 김화군 김성면에서 출생했다. 평양 요한학교와 동경제국고등음악학교를 졸업한 후 평안남도 강서군 문동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했고, 해방 후에는 서울 금양초등학교 교사를 거쳐 영락교회가 설립한 대광고등학교 음악교사로 일하면서, 영락교회 성가대를 지휘했다.

한국전쟁 때는 해군본부 정훈음악대에서 복무하면서 한국교회음악협의회를 창립했다.

한양대 음대 교수를 지내던 그는 1973년 이민을 가서 미국 웨스트민스터대학교에서 음악을 공부했으며, 1979년 캐나다 이주한 후 목사안수를 받고 토론토 큰빛교회를 개척했다. 큰빛교회 후임은 북한 돕기 사역을 하다가 북한에 2년 6개월이나 억류되었던 임현수 원로목사이고, 현재 토론토 최대 한인교회로 부흥성장을 일구었다. 

임현수 목사는 박재훈 목사의 별세 직후 SNS을 통해 가장 존경하고 아버님처럼 섬기던 목사님께서 생을 마감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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