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분 혹은 미의 상징 화장, 로마시대에 크게 발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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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 혹은 미의 상징 화장, 로마시대에 크게 발달
  • 이상규 교수
  • 승인 2021.07.20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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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교수의 초기 기독교 산책 - 일상생활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 화장(化粧)

어느 시대든 아름다움을 향한 인간의 욕망은 가장 강력한 힘이었다. 외모를 꾸미고 화장(化粧)을 하거나 문신을 새기는 일은 우리 시대의 일상이 아니라 고대에도 동일했다. 특히 여성에게 있어서 미(美)에 대한 추구는 본능적인 것이었다. 타인으로부터 부러움과 찬사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끊임없이 자신을 충동했다. 그러기에 미에 대한 추구, 곧 외모지상주의는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긴 역사를 지니고 있다.

화장술이나 화장 도구나 재료가 발달한 오늘날에는 신체를 치장해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하거나 신체의 약점을 위장하는데 있지만, 원시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모든 것이 자연 상태였던 만큼 풀이나 나무, 열매와 같은 자연물이 화장의 재료였고, 그 목적 또한 아름다움만이 아닌 보다 다양한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당시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화장은 크게 4가지 목적으로 설명되어 왔다.

첫째, 신분표시설인데 공동체가 형성되고 정착생활이 시작되면서 종족을 구분할 뿐 아니라, 집단 내에서의 신분, 계급을 구분할 필요를 느끼게 되어 신체 채색이나 문신을 새겼다는 주장이다. 둘째, 자기 보호설인데, 인간은 태생적으로 자기 보호본능을 지니고 있고, 동물이나 다른 종족의 위협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화장을 했다는 주장이다. 셋째, 장식설인데, 인간 내부의 자기 과시욕이 화장의 기원이 된다는 주장이다. 이 점이 외모를 아름답게 꾸미려는 의도였다. 넷째, 종교의식설인데, 자연의 힘 앞에 나약했던 인간은 종교적 이유로  화장하거나 장식하고 문신을 했다는 주장이다. 고대 이집트의 화장술은 크게 발달했고, 기원전 1400년경 투탕카멘의 양어머니로 알려진 네페르티티 여왕 시대의 화장술은 현재까지도 신비로운 기술로 알려져 있다. 어느 이유이든 고대 이집트 시대부터 화장이 있어 왔다. 그런데 로마시대에 화장은 다른 이유보다 아름다움의 추구가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문신(紋身)도 화장의 일부로 이 역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1991년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 국경지역인 오찰(Otzal) 알프스에서 한 남성이 냉동 미라 상태로 발견되었는데, 놀랍게도 온 몸에 61개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이 남성은 5,300년 전 쯤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온 몸에 가로와 세로의 선들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신분의 구분이거나 자기 보호, 장식, 혹은 종교적 이유 중 어느 것에 해당하는가에 대해서는 딱히 확정할 수 없지만 문신의 역사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동아시아에서는 문신이 형벌의 일종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기원전 3세기 때인 중국 진, 한나라 때의 법률이 기록된 목간(木簡, 글을 적은 나무 조각)이 발견되었는데, 문신이 여러 형벌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었다고 한다. 죄목을 얼굴에 새겨 일생 동안 지워지지 않게 했는데 이를 경형(黥刑)이라고 불렀다. 묵형 할 경(黥)과 형벌 형(刑)을 조합한 ‘경형’이란 죄인의 살에 먹실로 죄명을 써넣는 형벌을 의미했다. 하기야 로마 시대 노예들의 신체에 노예임을 표시하는 에스(s, servus)나 디 자(d, doulos) 모양의 문신도 일종의 신분 구별이자 형벌에 속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로마시대에 화장은 크게 발달했다. 기원전 3세기 로마가 그리스를 정복한 이후 그리스 화장술은 로마로 전파되었고, 로마시대 여성들의 화장은 보편적 현상이 되었다. 화장이나 문신은 외적인 자기표현 혹은 자기 과시로 나타났고, 이를 통해 자신의 건장함이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자 했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 지도자들은 화장에 대해 어떻게 가르쳤을까?

백석대 석좌교수·역사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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