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일각에서는 매년 발표되는 신뢰도 조사 결과를 두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곤 한다. 복지를 봐도, 교육을 봐도 교회가 감당하는 비중이 이렇게 큰데, 사람들이 잘 몰라서 교회를 지적하는 거라는 게 그들의 이야기다.
맞다. 분명히 교회는 한국 사회에 엄청난 시혜를 베풀고 있다. 사회적 기업에 근무하는 지인이 있다. 최근 ㅇㅇ지역에서 외국인 노동자를 상대로 묻지마 폭행이 일어났는데, 불법체류자라 그를 도울 마땅한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기자에게 연결할만한 교회가 없느냐고 대번 질문한다. 이런 사각지대에서 손 내밀 곳은 교회뿐이라는 말과 함께. 이 말은 대가를 바라지 않고 선의를 베푸는 교회들이 참 많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지난 2007년 태안 앞바다에 원유가 유출됐을 때도 무려 80만명의 자원봉사자가 한국교회를 통해 현장을 찾았다. 전체 봉사자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숫자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에서 한국교회를 바라볼 때 이런 선한 사마리아인과도 같은 자랑스러운 모습을 먼저 떠올리는 이는 몇이나 될까. 선행을 수백만 번 했어도 개인이 경험한 한국교회의 이미지가 좋지 않았다면, 그것이 곧 한국교회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다.
코로나19를 지나며 ‘교회’라는 이름이 뉴스를 장식하는 일이 많았다. 그 가운데 이단이 한 짓도 있었다. 신천지까지도 교회로 인식하는 교회 밖 사람도 많다. 분명 억울할 만하다. 그런데도 우리는 억울함만 호소할 수는 없는 처지다.
파리바게뜨의 전신인 삼미당이라는 빵집이 있었다. “빵을 수백만 개 만들어도 고객은 빵 하나로 평가한다”는 이 빵집이 내세우는 정신은 복음과 세일즈의 분명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교회’라는 이름을 걸고 나가는 메시지가 교회 밖 사람들에게 어떻게 읽힐지 진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리고 교인 한 명 한 명이 모두 세상을 향한 편지임을 자각하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길러내기 위한 뼈를 깎는 노력이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