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fairness), 평등한 출발, 그리고 희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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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fairness), 평등한 출발, 그리고 희년
  • 남기업 소장
  • 승인 2021.06.29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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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업 소장/토지+자유연구소 소장
토지+자유연구소의 남기업 소장. 그는 자신이 외쳐온 희년사상을 몸소 실천하기 위해 늘 고민한다. 그가 연구와 활동만큼이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말씀과 기도다. 말씀과 기도는 한국 희년운동의 대부인 대천덕 신부가 가장 강조하는 기본이기도 하다.
토지+자유연구소의 남기업 소장. 

‘공정’이란 말이 한국 사회를 강타하고 있다. 공평과 달리 공정(fairness)은 경쟁에서 나온 말이다. 경쟁을 나쁘게 보는 사람도 많지만, 경쟁은 사람이 살아가는 사회에서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공정한 경쟁은 사회를 역동적이게 만든다. 사회구성원들을 노력하게 만든다. 당연히 성경도 경쟁을 나쁘다고 보지 않는다. 다만 불공정한 경쟁이 잘못되었다고,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할 뿐이다. 경쟁이 공정하기만 하면 경쟁의 결과가 불평등한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니 불평등한 결과가 정의롭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과연 공정이란 무엇인가? 나는 ‘평등한 출발’과 ‘반칙 없는 경쟁 과정’의 합으로 정의한다. 그 반대의 상태인 불평등한 출발, 즉 남들보다 특별한 조건에서 출발하는 특권을 누리는 것이나 경쟁 과정에서 다른 사람에게 해를 가하는 것은 ‘불공정’이다.

한번 생각해보자. 참가 자격이 일부에게만 주어지는 육상경기, 참가하더라도 절대다수의 선수들은 고무신을 신고 달리는데 극소수의 선수들은 값비싼 스포츠화를 신고 달리는 경기, 경기 중에 한 선수가 다른 선수의 발을 걸어도 심판이 눈감아주는 경기를. 이런 경기에 참가하는 선수들은 물론이고 그것을 바라보는 관중들은 짜증을 내거나 분노한다. 왜 그럴까? 그것은 한마디로 불공정하기 때문이다. 특권을 가진 일부의 사람들을 제외하곤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공정한 경기를 원한다.

여기서 말하는 ‘공정한 경기’란 참가의 기회가 모두에게 열려 있고 참가자가 같은 조건에서 출발하며, 경기 중에 반칙한 사람에겐 거기에 걸맞은 벌을 주는 경기를 말한다. 이런 경기에 참가하는 선수는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발휘하고, 관중들은 이를 보며 즐거워하며, 승자에게 거짓 없는 찬사를 보내게 된다. 그런데 공정의 위와 같은 뜻을 이해하는 데 무슨 대단한 지식이 필요한 게 아니다. 공정에 대한 이런 관념은 지위고하,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다. 공정은 하나님이 우리 마음속에 심어준 생각이다.

그런데 지금 운위되고 있는 공정 개념은 아무리 들여다봐도 '평등한 출발'이 빠져 있다. 대학 순위, 시험 성적이 유일한 기준이고, 그 외의 것을 통해서 얻은 결과는 ‘새치기’라고 말한다. 그러나 어떤 부모를 만나느냐와 공부에 타고난 재능이 있느냐가 시험 성적, 대학 입시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는 너무나 불공정하다. 부모가 가난하거나 공부에 재능이 없는 사람이 경쟁에 참여하면 열이면 열 모두 패자가 된다. 그런데 부모와 타고난 재능은 선택의 대상이 아니다. 생각해보라. 선택하지 않은 것에 의해서 열패자가 결정된다는 것이 과연 공정한가? 한 번의 시험 성적이 평생을 좌우하는 것이 공정한가? 그렇다. 평등한 출발, 재출발의 기회 제공 등을 무시한 채 오로지 시험으로만 경쟁하자고 하는 것은 현실의 불평등에 순응하라고 윽박지르는 것에 불과하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인의 고민은 어디에 있어야 할까? 세상은 어차피 살아남아야 하는 정글이니 기도하면서 순위권 안에 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까? 그러나 이것은 기독인의 자세가 아니다. 기독인은 지금의 공정 담론 자체를 문제 삼아야 한다. 그러는 동시에 평등한 출발을 보장하고 경쟁 과정에 반칙이 없도록 해야 하며, 경쟁에서 탈락 혹은 실패했어도 재출발이 가능하도록 시스템을 구축하자고 해야 한다.

이런 공정의 개념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것이 바로 희년이다. 안식일, 안식년을 포함하고 있는 희년은 모든 사람에게 땅을 골고루 나눠줘서 평등한 상태에서 출발하도록 한다. 열심히 농사한 사람, 심혈을 기울여 자기 일을 한 사람이 더 많은 결실을 얻는 것을 성경은 당연하게 여긴다. 그러나 희년은 중간에 실패했더라도 언제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불의의 사고로, 사업의 실패로 땅을 잃어버리고 엄청난 부채를 졌다고 하더라도 땅을 다시 찾을 기회를, 부채에서 주기적으로 해방될 기회를 끊임없이 제공했다는 점을 잊으면 안 된다.

성경은 지금의 공정 담론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한다. 평등한 출발을 보장하고, 재출발의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 사회에게 촉구하고 있다. 이런 시선을 확보하지 못하면 기독인은 단지 지금의 불공정한 사회, 극도로 불평등한 사회를 옹호하고 고착화시키는 데 기여할뿐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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